
제2차 포에니 전쟁, 흔히 '한니발 전쟁'이라 불리는 전쟁 당시 로마에는 '이탈리아의 검'이라 불리던 집정관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Marcus Claudius Marcellus, 기원전 268년~기원전 208년)입니다.
로마 공화정 최고 명문가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으로, 세계 최강의 전술가 한니발을 상대로 혈투를 벌인 이 위대한 장군의 생애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한니발과 맞서기 전까지의 마르쿠스
고대 로마에는 여러 유력 귀족 가문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방패'라 불린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배출한 파비우스 가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배출한 코르넬리우스 가문, 그리고 마르쿠스가 태어난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대표적입니다.
그중에서도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아피안 도로 건설로 유명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제정 시대 로마에서는 여러 황제를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으로, 로마 역사 전반에 걸쳐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가문이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대대로 용맹한 무인을 배출해 온 집안이었는데, 마르쿠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용맹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온화한 성격이었으며, 다른 로마 귀족들처럼 뛰어난 그리스 문화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는 시칠리아가 무대였던 제1차 포에니 전쟁에도 참전했으며, 이후 호민관(아이딜레)에 선출되었습니다.
호민관은 로마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직위로,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자리였습니다. 마르쿠스가 얼마나 유망한 인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후 그는 두 번째로 중요한 자리인 법무관(프라이토르)에 선출되었고, 갈리아인(켈트족)과의 전투에서 더욱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로마의 최고 직위인 집정관(콘술)에 올라 여러 차례 군사적 업적을 세우고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하는 등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과의 대결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불립니다.
초기 로마는 세계 역사상 최강의 전술가로 꼽히는 한니발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특히 칸나이 전투의 패배는 참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당시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전사했고, 7만 명의 로마군 중 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에 로마는 '이탈리아의 방패'라 불리는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건의에 따라 한니발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는 소모전 전략을 채택합니다.
한니발 본인도 로마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주변 동맹국들을 분리시키는 전략으로 맞섰지만, 용맹한 마르쿠스는 칸나이와 같은 정면 결전은 피하면서도 한니발을 상대로 끊임없이 소규모 게릴라 공격을 반복하는 전술을 폈습니다.
이러한 과감하고 공격적인 전투 방식 덕분에 마르쿠스는 '이탈리아의 검'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마르쿠스는 놀라 전투에서 비록 작은 규모였지만 한니발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로마 전체에 큰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이후에도 마르쿠스의 끊임없는 공세는 계속되었습니다. 카르타고와 스페인에서의 보급 부족으로 한니발 진영은 소모전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고, 마르쿠스가 추격할 때마다 한니발은 몇 년씩 도주를 거듭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로마의 오랜 동맹국이었던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이 사망하자, 시라쿠사는 한니발 편에 서게 됩니다.
마르쿠스는 곧바로 군대를 시칠리아로 돌려 시라쿠사 공략에 나섭니다. 칸나이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병사들이 이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병력은 약 3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당시 시라쿠사에는 후세에 이름을 남긴 천재 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있었는데, 그는 다양한 발명품을 만들어 로마군을 크게 괴롭혔습니다.
마르쿠스는 시라쿠사 공방전 중 '내 로마군이 노인 하나에게 놀아나다니...'라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아르키메데스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전설적인 아르키메데스의 거울과 투석기 같은 발명품들이 로마군을 괴롭혔지만, 마르쿠스는 결국 시라쿠사 함락에 성공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마르쿠스는 시라쿠사가 아르테미스 축제 날 밤 술에 취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날을 공략일로 정해 성을 넘보았다고 합니다.
참고로 당시 아르키메데스는 로마 병사가 다가와서도 연구에 몰두하다 '내 원을 망치지 마라!'라며 저항하다가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집니다.
흥미롭게도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 메달에는 아르키메데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시라쿠사에서 돌아온 마르쿠스는 다시 한니발과의 전투에 복귀합니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한니발에게 반격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면서 조금씩, 그리고 확실하게 적군을 소모시켜 나갔습니다.
기원전 208년, 다섯 번째 집정관에 당선된 마르쿠스는 마침내 한니발과의 전투 중 전사하고 맙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로마에는 새로운 영웅이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마르쿠스에 대한 평가
한니발은 훗날 스키피오에게 패배하지만, 그 무렵 그는 이미 상당히 지쳐 있었습니다.
로마가 한니발을 이기고 강대국 카르타고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은 마르쿠스와 파비우스가 한니발을 지속적으로 소모시켰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힘으로 한니발을 꺾지는 못했더라도, 로마는 전체적으로 한니발에게 승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쿠스는 로마를 구한 영웅 중 한 사람이라 할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