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브루투스, 너도 그런가! 카이사르를 암살한 두 명의 브루투스 이야기

브루투스, 너도 그런가! 카이사르를 암살한 두 명의 브루투스 이야기

셰익스피어가 왜곡한 카이사르 암살의 진실

셰익스피어의 영향 때문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브루투스를 카이사르 암살의 배후로 생각하지만, 사실 주모자는 카시우스였습니다.

카이사르 주변 인물들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묘사는 상당히 왜곡되어 있습니다. 역사관마저 자신만의 색으로 물들인 셰익스피어는 문제지만, 훗날 저명한 평론가 버나드 쇼는 “셰익스피어는 카이사르를 몰랐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차치하더라도, 폼페이우스로서는 참 억울한 처지입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기번이나 맘젠보다 이전 시대의 인물입니다. 마치 인터넷이 없던 시대처럼, 그는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재미있는 희곡을 쓰는 극작가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그리고 사실, 카이사르 암살에는 ‘두 명의 브루투스’가 참여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은 약 40명에 달했고, 그중 두 명이 '브루투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명은 카이사르의 평생 정부였던 세르빌리아의 아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입니다.

다른 한 명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로, 옥타비아누스가 어떤 사정으로 후계자가 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인물입니다.

“브루투스, 너도 그런가!”라는 카이사르의 유명한 말은 사실 데키무스에게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데키무스는 셰익스피어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연극으로서는 그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지금부터 두 명의 브루투스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먼저 데키무스 브루투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카이사르의 먼 친척으로, 같은 이름을 가진 아버지는 기원전 77년 집정관을 지냈습니다.

카이사르는 그를 무척 아꼈고, 데키무스는 갈리아 원정에도 참전해 뚜렷한 군공을 세웠습니다. 카이사르는 인재를 공정하고 엄격하게 평가했기 때문에, 데키무스는 후계자 후보로서 이름을 낼 만큼 충분히 유능한 인물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안토니우스조차 후계자 후보에 오르지 못했고, 아들 카이사리온은 유언장에 언급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데키무스가 암살단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가 카이사르 암살에 참여한 동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촌인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권유로 가담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로마가 왕정에서 벗어난 이래 시민들은 공화정을 지키는 일을 최우선 가치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스키피오 재판이 있었고, 카이사르 암살이 있었던 것이죠.

로마 독재관의 임기는 원래 6개월이었고, 종신 독재관이 된 술라도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럼에도 종신 독재관이 되어 왕처럼 군림하는 카이사르를 존경하면서도, 데키무스는 아버지처럼 암살에 가담했습니다.

나중에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접한 데키무스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혹시 암살의 동기는 자신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인정받지 못한 것은 데키무스가 아니라 안토니우스였는데 말이죠...

카이사르 암살 이후 그는 카이사르파와의 항쟁에 올인했지만,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의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도주하던 중 살해당했습니다.

카이사르가 그만큼 인기가 많았기에, 암살자들은 몸붙일 곳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브루투스, 너도 그런가! 카이사르를 암살한 두 명의 브루투스 이야기

카이사르는 생전에 ‘호색한 대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카이사르 본인도 이를 즐겁게 받아들였다고 하니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지만, 그의 여성 편력은 심각한 수준이었고, 원로원 의원 아내 셋 중 하나는 카이사르의 정부였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집니다.

실제로 정치적 동맹이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아내들 역시 카이사르의 정부였습니다.

카이사르의 최고의 정부는 바로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였습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능력과 무관하게 마르쿠스에게 특혜를 베푸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마르쿠스 본인은 로마에서 손꼽히는 명문 출신으로, 공화정의 창건자로 불리는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후손이자 국가 종교 직제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카이사르를 끝까지 미워한 소(小) 카토의 딸 포르키아와 결혼하며, 평생 반(反)카이사르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고리대금업자로도 악명이 높았습니다. 연 48%라는 까마득한 이자로 돈을 빌려주며 키케로 등에게까지 고리를 물렸습니다.

그런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대중적인 인기는 좋지 않았지만, 아들이 없던 카이사르는 마르쿠스를 친아들처럼 아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르쿠스 입장에서 보면 카이사르는 자신의 어머니를 빼앗아 간 남자였으므로, 에디푸스 콤플렉스가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카이사르 암살은 심리학적으로 아버지 살해와 다름없는 행위였던 셈입니다.

마르쿠스 본인도 오랫동안 카이사르를 미워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그는 폼페이우스 진영에 서서 싸웠습니다. 당시 카이사르는 “브루투스만은 해치지 말라”고 병사들에게 미리 일러두었을 정도였으니, 그에 대한 특별한 대우는 상당했을 겁니다.

살고 죽고가 걸린 전쟁에서 적진에 있던 자신을 살려달라고 배려했으니, 카이사르의 그릇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쿠스는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죠.

카이사르는 적대했던 마르쿠스를 용서하고 품어주었으며, 심지어 프라이토르(법무관) 자리까지 추천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를 죽였습니다.

“독재자는 이래야 한다”

라며, 그는 잔혹하게 칼을 휘둘렀습니다.

훗날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한 단테는 그의 걸작 『신곡』에서, 공화정 창건자의 후손이었다는 이유에서인지 어머니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는지, 브루투스를 예수를 배반한 유다와 공범 카시우스와 함께 역사상 3대 배신자 중 하나로 묘사하고, 사탄에게 물리는 형벌을 받는 모습으로 그려냈습니다.

후세에서조차 이런 평가를 받았으니, 당시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브루투스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될 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언장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에 놀란 나머지 즉시 목숨을 끊지 않고, 안토니우스와 손잡고 적통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에 맞섰습니다. 삼두정치가 시작되자 ‘페디우스법’이 제정되어 카이사르 암살자는 재판 없이도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게 됩니다.

마르쿠스는 광활한 로마 본토를 떠나 그리스에 강제로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10만 군단을 조직해, 필리피에서 제2차 삼두정치파와 맞붙었습니다 (필리피 전투).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를, 옥타비아누스와 부하 아그리파는 브루투스를 각각 상대했습니다. 브루투스는 승리했지만, 카시우스는 패배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신은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브루투스는 살아갈 의욕을 잃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배신자의 결말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