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185년, '라틴' 노르만족을 궤멸시킨 비잔틴의 압도적 승리

1185년,  라틴  노르만족을 궤멸시킨 비잔틴의 압도적 승리

1185년,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던 시칠리아의 노르만 약탈자들이 제국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를 공격해 점령하고 유린했습니다. 이 도시를 거점으로 삼으면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손쉽게 위협할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당시 제국은 찬탈자 안드로니코스 1세 코무네노스가 다스리고 있었으나 그는 폐위된 뒤 살해되었고, 무능한 황제 이삭 2세 앙겔로스가 즉위합니다. 다행히도 그는 유능한 장군 알렉시오스 브라나스를 곁에 두고 있었습니다.

판텔리스 D. 카리카스 집필

제국의 반격

테살로니키 함락 후 노르만족은 병력을 분산시키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자신들과 겨룰 만한 상대로 여기지 않으며 비잔틴인들을 과소평가한 그들은 스트리몬 지역과 세레스, 암피폴리스를 점령하기 위해 한 부대를 파견했고, 또 다른 부대는 모시노폴리스 방면으로 진군해 수도로 통하는 길을 열려 했습니다. 나머지 세 번째 부대는 테살로니키에 잔류했습니다.

두 번째 노르만 부대는 모시노폴리스를 점령하며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발판을 확보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비잔틴은 아직 마지막 말을 다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알렉시오스 브라나스는 소아시아에서 온 부대로 증원을 받은 뒤 먼저 모시노폴리스로 진격했습니다. 도시를 차지했던 노르만족은 성벽 밖으로 나와 대열을 갖추었고, 이른바 '그리핀'(그리스인의 개라는 멸칭)이라 조롱하며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브라나스는 그들을 격파해 성벽 안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어 그는 도시로 돌진했고, 병사들은 성문을 불태우고 들어가 테살로니키와 그 밖의 지역에서 그리스인들에게 저지른 것과 똑같이, 가차 없이 모든 노르만인을 학살했습니다.

이후 비잔틴 장군은 스트리몬 일대를 유린하던 노르만 부대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정확한 병력 규모는 전해지지 않지만, 비잔틴군은 세레스 북서쪽 데미트리치 일대에서 노르만족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이 전투에 관한 1차 사료인 역사가 니키타스 코니아테스에 따르면, 노르만군은 발드윈과 리샤르 백작이 지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데미트리치 전투

노르만족은 처음에는 크게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모시노폴리스에서 아군이 궤멸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로는 브라나스와의 협상을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잔틴 장군은 이를 두려움의 징후로 판단했고, 최대한의 기세를 실은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합니다.

브라나스는 나팔 소리도, 어떤 신호음도 없이 11월 7일 해 질 녘 공격 신호를 보냈습니다. 완전히 기습당한 노르만군은 짧은 저항 끝에 대열이 와해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살해되었고, 일부는 스트리몬 강에 빠져 목숨을 잃었으며, 두 장군을 포함한 대다수는 승자인 비잔틴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쟁의 구호를 기대하지 말라. 나팔 소리도, 장군들이 교전에 앞서 흔히 내리는 다른 명령도 없이 그들은 검을 뽑아 들고 적진으로 달려들었다. 로마인들(비잔틴인들)을 향해 담대하고 용감하게 돌진했으나, 전황은 여러 차례 기울었다."

"마침내 로마군의 맹공을 이기지 못한 그들은 물러서며 고개를 숙이고 후퇴했다. 그리하여 포로로 잡히고, 끌려가고, 스트리몬 강변으로 몰려갔다. 11월 초순 어느 날, 해 질 녘에 이 일이 벌어졌다"라고 니키타스 코니아테스는 전합니다.

결과

참패 후 살아남은 노르만족은 처참한 소식을 안고 테살로니키로 도주했습니다. 공포에 질린 그들은 배를 타고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지만, 많은 이들이 혹독한 겨울 에게 해의 악천후 속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도시에 남았던 자들은 자비 없이 학살당했고, 얼마 뒤 브라나스의 군대는 해방자로서 이 위대한 그리스 도시에 입성했습니다. 약 4,000명의 노르만 포로는 쇠사슬에 묶인 채 수도로 압송되어 남은 짧은 생을 크나큰 고통 속에 보냈습니다.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국은 이 패배로부터 결코 회복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