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삼국 전쟁을 일으키고 결국 처형당한 잉글랜드의 찰스 1세

세계사의 수많은 사건 가운데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오르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그 몇 안 되는 예외 중 하나가 바로 찰스 1세 시대에 일어난 청교도 혁명이다.

이번 글에서는 청교도 혁명 도중 처형대에 오른 비운의 군주, 찰스 1세의 생애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버지 제임스 1세와 정반대였던 소년

찰스 1세는 1600년, 스튜어트 왕조 잉글랜드의 초대 국왕인 제임스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찰스에게는 원래 왕세자였던 형이 있었지만, 1612년 형이 천연두로 요절하면서 찰스가 차기 왕으로 확정되었다.

찰스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며 훌륭하게 성장한 형에 대해 깊은 열등감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영향으로 아버지와도 자주 대립했다. 본래 말더듬이었던 찰스의 성격에도 이러한 배경이 한몫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625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찰스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국왕 찰스 1세로 즉위했다.

평화의 길을 걷던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찰스 1세는 '전쟁왕(Rex Bellicosus)'이라 불릴 만큼 외교 정책에서 강경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

삼국 전쟁을 일으키고 결국 처형당한 잉글랜드의 찰스 1세

즉위하자마자 찰스 1세는 스페인 카디스로 원정군을 파견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측근 버킹엄 공작의 조언에 따라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의 여동생이자 가톨릭 신자인 앙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국내 여론의 반발까지 샀다. 버킹엄 공작이 연이은 패배와 무능한 국정 운영으로 비판을 받았음에도, 찰스 1세는 그를 끝까지 보호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의회와의 대립이 깊어지자 찰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의원들을 체포·수감했고, 군대를 귀족들의 저택에 억류시켰으며,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걷었다.

원래 잉글랜드 국왕은 '법'에 따라 의회의 승인을 받은 뒤에야 과세할 수 있다는 전통과 규범이 있었지만, 찰스 1세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에 맞서 의회는 유명한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을 찰스 1세에게 제출했다. 그 내용은 국왕이 조상의 법을 준수하고 과세 시 반드시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특별한 요구는 아니었다.

찰스 1세는 이를 쉽게 수용하는 듯했지만, 정작 의회를 다시 소집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왕권신수설'을 방패 삼아 절대군주제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찰스 1세의 심복이었던 버킹엄 공작이 암살당했다. 이를 계기로 국왕과 의회의 갈등이 다시 격화되었고, 찰스 1세는 결국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청교도 혁명

찰스 1세는 이후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그동안 토머스 웬트워스와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가 국정을 주관했으며, 사실상 권리청원을 파기한 채 수많은 의원들을 체포하고 투옥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칼뱅파 개신교 계열인 '청교도'가 힘을 키워갔고, 찰스 1세는 이들 청교도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더욱이 제임스 1세의 노선과 달리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에 의한 통제가 스코틀랜드에까지 적용되면서, 이곳에서도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국왕이기도 했지만, 스코틀랜드에서의 대관식은 즉위 후 7년이 지난 1633년에야 거행되었다. 스코틀랜드 백성들은 처음부터 찰스 1세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스코틀랜드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부재 군주'였다는 점도 불만에 불을 지폈다.

1638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를 중심으로 국왕에 대한 반란이 폭발했다. 찰스 1세는 진압군을 파견하기 위해 11년 만에 처음으로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출신 의원들이 진압에 협조하지 않자 찰스 1세는 다시 의회를 해산했다. 이 의회가 존속한 기간이 겨우 3주에 불과했기에, 세계사에서는 이를 '단기의회(Short Parliament)'라고 부른다.

그동안 스코틀랜드 군대는 계속 남진해 왔고, 찰스 1세는 배상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화해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국왕에게 그만한 자금이 없었기에,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다시 열기로 결정한다.

훗날 '장기의회(Long Parliament)'라 불리게 되는 이 의회는 국왕의 측근들에 대한 탄핵으로 문을 열었다. 또한 매년 최소 50일 이상 의회를 개최할 것, 그리고 의회 승인 없는 과세는 무효로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스코틀랜드 의회 역시 찰스 1세에게 비슷한 요구를 했고, 아일랜드에서마저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 몰린 찰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개혁파 의원들을 습격했고, 여기서 의회파와 국왕파 간의 내전, 곧 훗날 청교도 혁명이라 불리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청교도 혁명'이라는 명칭은 일본에서 널리 정착된 것이지만, 영국과 미국에서는 같은 사건을 '삼국 전쟁(War of the Three Kingdoms)'이라고도 부른다.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세 왕국이 모두 휘말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 명칭이 실상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찰스 1세의 처형

전쟁 초기에는 국왕 쪽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찰스 1세는 자신 편의 의회를 따로 열었고, 잉글랜드에는 두 개의 의회가 나란히 존재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한편 스코틀랜드와 연합한 의회파 진영은 내분을 겪는다. 의회파는 국왕과의 화해를 추구하는 '장로회파(Presbyterians)'와 국왕과 철저히 싸우자는 '독립파(Independents)'로 갈라졌는데, 독립파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은 철기대(Ironside)를 이끌고 내즈비 전투에서 국왕군을 대파했다. 패색이 짙어진 찰스 1세는 결국 항복했다.

그러나 찰스 1세에게 반성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독립파의 반대 세력과 손잡으려 한다는 사실이 발각되었고, 이에 186명의 의원이 체포·추방되었다.

세계사에서는 이 사건을 '프라이드의 숙정(Pride's Purge)'이라 부르며, 이후의 의회는 '잔부의회(Rump Parliament)'로 기능하게 된다.

1649년,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찰스 1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결과는 사형이었다.

사형 판결은 135명의 표결에서 과반수에 못 미치는 67명의 찬성으로 통과되었고, 사형 선고문에 서명한 인원은 59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크롬웰은 국왕의 처형을 강행했다.

처형을 지켜본 크롬웰은 "잔혹함은 때때로 필요하다"라며 미소 지었다고 전해진다.

찰스 1세에 대한 평가

찰스 1세가 역사적으로 실패한 군주, 이른바 '어두운 군주'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어두운 군주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온 나라를 반란으로 몰아넣은 것도 결국 그 자신의 행태 탓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형이 정당했다는 뜻은 아니다. 찰스 1세의 처형은 오늘날까지도 영국 역사의 어두운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