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로마 영사를 세 번이나 역임했지만 활동상은 잘 알려지지 않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이야기

로마 영사를 세 번이나 역임했지만 활동상은 잘 알려지지 않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이야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장인이자,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오른팔이며, 로마의 집정관을 무려 여러 차례 역임한 인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의 이름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로마 공화정 말기의 격변기를 관통한 그의 발자취는,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거목이 태어나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내전의 시대, 어지럽던 로마

기원전 1세기 전후의 로마는 '내전의 시대'라 불릴 만큼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남쪽에서는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가 반란을 일으켰고(유구르타 전쟁, 기원전 112~106년), 북쪽에서는 게르만계 부족인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밀려들었습니다. 이어서 동방에서는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가 세력을 확장하며 지중해 동부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로마의 동맹 도시들마차도 시민권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키면서(동맹시 전쟁, 기원전 91~88년), 로마는 진정한 내우외환의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평범한 국가였다면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로마에 등장한 두 명의 걸출한 장군,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이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민중파(포풀라레스)의 영수 마리우스와 원로원파(옵티마테스)의 기둥 술라는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정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원전 88년,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토벌을 위해 그리스 방면으로 진군할 준비를 하던 때, 마리우스는 호민관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손잡고 동방 원정 지휘권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격분한 술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이 이끄는 로마 군단을 수도 로마로 향하게 했습니다. 마리우스는 도주하여 아프리카로 피신했고, 술라는 정적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 뒤 그리스로 출진했습니다.

술라는 로마를 떠나며 후배 격인 킨나에게 수도의 방위와 통치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됩니다.

술라를 배신하고 마리우스를 불러들이다

킨나는 술라의 뜻을 배신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동맹시민들의 권익 신장을 추진하다가 동료 집정관 옥타비우스와 충돌해 일시적으로 로마에서 축출되었지만, 곧 이탈리아 각지의 병력을 규합해 세력을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 숨어 있던 마리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로마에 재진입한 마리우스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그는 술라파 인사들을 철저히 몰살했을 뿐만 아니라, 술라에게 적대하지 않았다는 애매한 이유만으로 무고한 사람들까지 처형하는 참혹한 학살극을 벌였습니다. 이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숙부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마리우스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마리우스는 일곱 번째 집정관에 취임하지만,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합니다. 도망칠 때는 늙어 빠졌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는데, 돌아와서는 로마를 유혈로 물들이다 간, 정말로 무서운 노인이었던 셈입니다.

마리우스 사후 킨나는 민중파의 지도자로서 로마를 이끌었고, 술라가 돌아오기 전까지 집정관에 연이어 선출되었습니다. 이 시기 킨나는 자신의 딸 코르넬리아를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카이사르와 코르넬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 율리아는 훗날 폼페이우스의 아내가 됩니다.

술라와의 대결, 그리고 갑작스러운 죽음

한편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강화 조약을 체결한 술라는, 드디어 로마로 돌아올 준비를 마쳤습니다. 술라의 깃발 아래에는 젊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같은 유능한 지휘관들이 하나둘 합류했습니다. 이들을 맞이하는 것은 킨나가 이끄는 로마 정규군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킨나는 술라가 도착하기도 전에, 반란을 일으킨 자기 병사들의 손에 비명횡사하고 맙니다.

결국 킨나는 패배했던 마리우스를 복귀시켜 로마를 혼란에 빠뜨리고 유혈사태를 낳은 인물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흥미롭습니다. 만약 킨나의 행보가 없었다면 훗날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없었을 것이므로, 킨나에게도 일종의 공은 인정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폭군이 아니라 온건한 개혁가였던 킨나

흥미로운 점은, 킨나 본인은 결코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정치는 온건했고, 집정관으로 재임하던 몇 년 동안 그의 인기와 지지 기반은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는 부채를 경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탈리아 동맹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확대하는 등 대중의 두터운 지지를 받았습니다.

로마 영사를 세 번이나 역임했음에도 스스로의 활동상은 화려하지 않았던 킨나. 그러나 그가 남긴 정치적 유산은 딸의 남편,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통해 로마 역사 전체를 바꾸어 놓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