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비톨트 필레츠키(Witold Pilecki)를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영원히 잊히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필레츠키의 기억을 지우는 데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수년이 지난 후에는 검열관조차 이 대위가 누구인지 몰랐고, 결국 이른바 '인민의 적'의 위업을 찬양하는 일련의 기사를 전국 신문에 실어 주고 말았다!
필레츠키는 1948년 5월 25일 총살되었다. 시신은 가족에게 인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처형 날짜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대위의 매장지는 오늘날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의 아들 안제이(Andrzej)는 저서 『필레츠키,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분노했다. 무엇보다 그의 기억마저 지우려 든 것에 대해. (...) 아마 1960년대였을 것이다. 나는 모래시계나 포스터를 손수 만들어 교회들에 붙였고, 포번스키(Powązki) 묘지 담벼락에도 붙였다. '비톨트 필레츠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그가 라코비에츠카(Rakowiecka) 거리 감옥에서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라고 쓰고 짧은 약력을 함께 붙이곤 했다. 운이 좋으면 일주일 정도 걸려 있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 뜻밖에도 안제이 필레츠키를 도운 이는 바로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언론이었다.

재판에 회부된 비톨트 필레츠키. 곧이어 사형 선고와 잊혀짐이 기다리고 있었다(사진: 퍼블릭 도메인).
검열관들의 무지
1979년 7월 14일, 폴란드 일간지 '쿠리에르 폴스키(Kurier Polski)'에 눈에 띄지 않는 기사 하나가 실렸다. 영국에서 출간된 『용기의 여섯 얼굴』에 대한 서평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획기적인 글이었다. 공산당 언론에서 비톨트 필레츠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실린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언론인 라파우 브제스키(Rafał Brzeski)였으며, 서평의 대상이 된 책에는 저명한 역사학자 마이클 푸트(Michael Foot) 교수가 선정한 유럽 반나치 저항 운동 최고의 용사 여섯 명의 프로필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는 '아우슈비츠의 자원입대자'로 불리는 필레츠키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는 필레츠키가 아우슈비츠에서 벌인 활동의 역사를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맺음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폴란드인과 그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오랜 세월 끝에, 마침내 서구 작가들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진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폴란드 저항 운동의 힘과 그 파급력, 그리고 병사들의 용기에 관한 진실이다.
오늘날 돌이켜보면, 필레츠키의 영웅성은 폴란드인들 자신에게도 하나의 발견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이런 글이 게재될 수 있었을까? '사회주의 조국' 배반죄로 사형까지 선고받은 인물을 찬양한 글인데 말이다. 모든 증거는 검열관들이 단순히 필레츠키가 누구인지, 전후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브제스키 본인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용기의 여섯 얼굴』 – 전후 언론에 실린 필레츠키에 대한 첫 번째 긍정적 기사.
애국심과 용기
앞서 언급한 서평이 게재된 후, 대위의 딸 조피아 필레츠카옵투워비치(Zofia Pilecka-Optułowicz)가 감격에 겨워 신문사 편집부를 찾아왔다. 그녀가 제공한 정보는 율리우시 스모친스키(Juliusz Smoczyński)가 집필한 훨씬 더 방대한 두 번째 기사의 재료가 되었다. 그는 8월 11일자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폴란드 민족은 자신의 영웅들을 기린다. 그중 한 사람이 의심할 여지 없이 비톨트 필레츠키다. 나치즘에 맞선 투쟁에서 보여준 그의 헌신적인 행보는 폴란드 애국심의 힘을 잘 보여준다.
이 말들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게 들렸을까! 이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은, 검열조차 그가 한때 '존재 자체를 말소'하라는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필레츠키를 누가 죽였는지 기억하는 이들도 있었고, '인민의 적'이 칭송받는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비톨트 필레츠키는 우리의 적이었다"
1980년 6월 3일, 당국은 검열 대장 제15/XIII호에 필레츠키 관련 출판물은 언론·출판·공연 통제 중앙청 지도부의 확인을 거치도록 하는 지시를 추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1년 7월 4일, '연대(Solidarność)' 열풍이 한창이던 시기에 '쿠리에르 폴스키'는 대위를 다룬 세 번째 글을 게재했다. 그리고 이전 기사들 이후 벌어진 일이 소개되었다.
당시 권력층의 한 인물이 우리를 호되게 질책했다. "누구에 대해 쓰는 거야! 누구를 널리 알리는 건데! 비톨트 필레츠키가 우리의 적이라는 걸 알고나?!"

"3년 전에는 (...) 진실 전부를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스모친스키는 이렇게 답했다. "적?! 오늘날 이 비극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자." 이어 기자는 3년 전에는 언급조차 할 수 없었던 내용, 즉 비톨트 필레츠키의 재판과 처형 과정을 상세히 기술했다. 그는 사형 선고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규정했고,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인민 폴란드 초기에 많은 이들이 혼란에 빠졌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사회주의를 지지하며, 폴란드 인민공화국 체제를 문제 삼는 것은 극소수의 극단주의자들뿐이다. (...) 그렇다면 오시비엥침(Oświęcim)의 영웅이 살아 있었다면 (...) 인민 폴란드의 충실한 시민이 되지 못했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극소수의 극단주의자들'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흥미롭다. 당시 연대 운동 진영은 1천만 명에 달하는 지지자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공산 체제 시절에 필레츠키가 사회주의를 지지했으리라는 상상은 터무니없는 발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주의 사법 살인이라고 직접 명명하지는 않았더라도 이 문제를 글로 다룬 용기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이야기 전체를 밝히고 온전히 규명하는 데에는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더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