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레니아의 다벨리스, 파블로스 쿠루피스
파블로스 쿠루피스(Pavlos Kouroupis)는 1929년 그리스 메시니아 지방의 작은 마을 덴트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시골의 자식 많은 가정에서 자란 그는 오랫동안 장교가 되는 것을 꿈꾸었고, 1952년 그리스 육군의 명문 에블피돈 사관학교를 졸업하며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학구열이 남다른 그는 군 복무와 병행하여 아리스토텔레스 대학교 법과대학까지 졸업했으며, 고등전쟁학교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습니다. 그 무렵 마리아 카르부니와 결혼하여 딸 에반겔리아를 두었습니다. 1972년 키프로스로 파병된 그는 제251 보병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1974년 7월 20일 펜데밀리 해안에서 침공을 준비하던 터키군과 마주하게 됩니다.
1974년 7월 20일, 침공의 시작
7월 19일 밤부터 20일 새벽까지는 온통 불안의 시간이었습니다. 새벽녘 터키 수중 요원들이 고속 군함에서 헤엄쳐 펜데밀리온 해안에 도착해 지뢰지대를 정찰했으나, 그리스 순찰대의 사격을 받고 손실 없이 물러났습니다.
한편 터키 함대는 계속 해안으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05:30에 펜데밀리온 해안에 상륙해야 했지만, 잘못된 지점으로 향하는 바람에 상륙 작전은 07:20에야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05:15부터 터키 공군은 키레니아-니코시아 지역의 군사·정치 목표물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개시한 상태였습니다.
06:00에는 낙하산 부대가 니코시아 월경지(키오넬리) 강화를 위해 투입되었고, 동시에 터키 특공대가 헬리콥터로 아기르타로 수송되었습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이 헬기들은 "우연히도" 그날 아침 키프로스 앞바다를 순항하던 영국 항공모함 '머큐리'에서 급유를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고립된 두 개의 중대
터키군은 처음에 저항 없이 제1해병대대 제2중대 소속 소대를 상륙시켰고, 이어 전 대대가 무사히 상륙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M-113 장갑차와 포병 중대를 동반한 제50 보병연대 병력이 상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과 맞선 것은 오직 하나, 축소 편제된 그리스 제251 보병대대뿐이었습니다. 대대장 쿠루피스 중령은 07:00에야 펜데밀리 전개 명령을 받았지만, 대대 진지 배후에는 터키키 프로스 마을 테므플로스—니코시아-아기르타스-테므플로스 월경지의 끝자락—가 위치해 있어 병력 일부를 그 방면에 배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교두보를 막는 데 투입된 것은 제1중대와 지원중대(중화기 중대) 단 두 개 중대뿐이었고, 여기에 지휘중대 인원, 서기, 요리사, 늦게 도착한 보충 병사들까지 총동원되었습니다. 그리스 키프로스 원정군(GEEF)은 여기에 T-34 전차 5대로 구성된 소대를 추가로 배속시켰습니다.
두 개의 그리스 중대가 상대해야 할 적은 포병과 군함의 함포, 그리고 공군의 지원까지 받는 연대 규모 병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 병사들은 사격을 개시해 터키군을 해안가 폭 350m, 길이 1,000m 구역 안에 묶어두었습니다.
침묵한 그리스 포병
교두보를 타격할 수 있었던 제182 야포중대는 명령을 기다리며 끝내 사격하지 않다가, 251TP 중대들의 분전을 알아본 뒤에야 포문을 열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프로페트 엘리야스 고지에 배치된 제198 산악포병이 한 발의 포탄도 발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군의 약점은 빠르게 간파되었고, 터키군은 교두보 확장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돌파 시도는 제1/251 중대가 격퇴했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 앞에 두 중대는 조금씩 진지를 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쿠루피스는 250~300명의 병력으로 '차크막' 상륙여단 소속 3,500명의 터키군을 계속 붙잡아두었고, 다행히 M-47 전차의 상륙도 좌절시켰습니다.
계획상이라면 제3 전술단(306·316 징집대대)이 즉시 증원해야 했지만, 결정적 시간에 이들은 전선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306TE는 결성조차 되지 못했고, 316TE 역시 단 하나의 분대만 편성되었을 뿐입니다.
키레니아로의 후퇴, 그리고 최후의 돌파 명령
제39 보병사단장 데미렐 소장이 도착하면서 터키군은 질서를 되찾았고, 11:00에 원래 목표인 키레니아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들 앞을 막은 것은 이틀간 쉼 없이 싸운 영웅적인 251TP의 두 중대, 키레니아에 남아 있던 306TE 병사 일부, 그리고 제33 특공중대의 약 150명이 전부였습니다.
대전차 미사일을 갖춘 유일한 그리스 부대인 제120 중화기중대를 비롯한 추가 증원은 끝내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정예 특공대였지만 충분한 대전차 무기가 없었던 이들은 터키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방어선이 무너져 키레니아 방향으로 흩어졌습니다. 포위될 위기에 처한 251TP 병력들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도시를 사수할 희망은 사라졌지만, 그들은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키레니아 입구에 이르기 직전, 차카스 소령과 함께하던 쿠루피스의 11인 그룹은 터키 한 개 중대에게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쿠루피스는 스미스앤웨슨 권총을 들고 병사들에게 터키군이 아직 미처 닿지 않은 동쪽의 작은 개울을 따라 포위망을 돌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병사들은 그를 떠나기를 거부했고, 재촉 끝에 눈물로 떠났습니다. 두 장교만이 엄호를 위해 남았습니다. "병사들이 떠나는 동안, 두 그리스 장교가 남은 곳에서 들려오던 총성은 점차 줄어들더니 완전히 잠잠해졌다." — 탈출한 병사의 증언
행방불명, 그리고 충격적인 진실
파블로스 쿠루피스 중령은 차카스 소령과 함께 그날 이후 행방불명되었습니다. 1995년 3월 27일, 기자 페트로스 카시마티스가 신문 '엘레프테로스 티포스'를 통해 공개한 문서는 당시까지 가장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스 정보국(EYP)은 생선장수로 위장한 얀노풀로스 대령을 통해 터키 볼루에서 실종자 6명, 데니즐리에서 7명을 확인했습니다. 간수를 매수하고 겨우 나눈 짧은 대화에서 그들은 모두 참담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파블로스 쿠루피스였습니다.
EYP는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터키 측과의 총격전으로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영웅 쿠루피스 중령의 흔적은 다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