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친독파'라 매도된 메타크사스, 오히(OXI)보다 2년 앞선 1938년부터 NO를 외쳤다!

 친독파 라 매도된 메타크사스, 오히(OXI)보다 2년 앞선 1938년부터 NO를 외쳤다!

'친독파' 메타크사스에 대한 왜곡된 평가

1940~41년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을 두고 요안니스 메타크사스(Ioannis Metaxas)에 대한 비판이 수없이 제기되어 왔다. 어떤 시각은 메타크사스를 이탈리아의 최후통첩에 차라리 '예스(YES)'라고 답하고 싶었던 단순한 '친독파(germanophile)'로 규정하고, 정작 '오히(NO)'를 외친 것은 그리스 국민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견해는 필자가 표현하듯 '암울한 1980년대' 그리스에서 좌파 진영을 중심으로 퍼져 지배적인 담론이 되었으며, 기존의 역사적 사실들을 지워버리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었던 하나의 진실

메타크사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가능하지만, 그를 한마디로 규정짓는 이들도 있다 — '바보'라고 말이다. 그러나 메타크사스는 '국민 분열(National Divide)'기를 직접 겪으며 그리스의 처지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가 유럽의 해양 강국(영국)과 힘을 합쳐야만 생존할 수 있으며, 대륙의 강국(독일)과 손잡는다면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적어도 1938년부터 그의 목표는 단순한 영국과의 관계 개선이 아니라 영국과의 동맹 체결이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당시 정세상 피할 수 없어 보이던 추축국과의 전쟁에 대비할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 1939년 4월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점령 이후 그러한 인식은 한층 더 확고해졌다.

1938년 10월, 영국 대사에게 밝힌 본심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킨 실패한 뮌헨 협정이 체결되고 며칠 뒤인 1938년 10월 3일, 당시 주그리스 영국 대사(1933~39년 재임) 시드니 워털로 경(Sir Sidney Waterlow)과의 대화는 그의 진심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영국과의 동맹입니다." 메타크사스는 말을 이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리스의 섬들과 항구가 영국 함대와 공군에 반드시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지리적 사실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는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동맹국으로서 귀국에 큰 가치가 되는 나라입니다."

그는 또한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는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굴욕보다는 완전한 파멸을 택하겠다"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점령한 직후 열린 영국 대사와의 후속 회담에서 메타크사스는 다시 한번 뚜렷한 입장을 밝혔다. "이탈리아가 침공해 온다면 그리스는 끝까지 저항할 것입니다. 우리는 굴욕당하는 것보다 완전히 파멸하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훗날 '오히(NO)' 이후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 문제는 패배나 승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는 국가로서 존속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1940년 10월 28일, 운명의 월요일

비판론자들의 논리를 따르자면 메타크사스는 '친독파'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절을 외쳤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그 운명적인 날, 즉 1940년 10월 28일 월요일에 800만 그리스 국민이 일제히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몰려가 대사에게 거세게 '거절'을 외쳤다는 주장은 지나친 과장이다.

실상은 이렇다. 이탈리아 대사 에마누엘레 그라치(Emanuele Grazzi)는 그보다 몇 시간 전 메타크사스의 저택을 방문해 최후통첩을 전달했고, '거절'이라는 답을 서류 가방에 담은 채 굴욕을 삼키며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피루스(Epirus) 지방 상공에 포성이 울려 퍼진 것이다. '오히'는 국민이 대신 말해준 것이 아니라, 메타크사스 자신의 결단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