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이전의 그리스 정부들은 키프로스에 대한 영유권을 공개적으로 주장할 만큼 과감하지 못했다. 오직 1941년 당시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가 영국에 키프로스 양도를 요청한 것이 전부였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정부 역시 외부에서 가해진 압력에 굴복하여 키프로스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파파고스 정부의 등장
1952년 11월 16일 그리스에서 실시된 총선에서 파파고스가 이끄는 '그리스 결집당(헬레닉 랠리)'이 압승을 거두며 정권을 잡았다. 선거 제도의 도움까지 받아 그는 의회에서 240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파파고스는 곧 치명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영국·미국과의 충돌
전임자들과 달리 파파고스는 키프로스 그리스계 주민들을 단순히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무장투쟁 결의를 실질적으로 강화했다. 먼저 1952년 12월 22일 영국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1954년 9월 16일에는 키프로스 문제를 유엔(UN)에 상정했다. 이 조치는 필연적으로 그를 영국과 미국과의 갈등 구도로 몰아넣었다.
EOKA 무장투쟁의 시작
1955년 4월 1일, 에오키아(EOKA)는 영국 목표물들을 향한 일련의 폭격 작전으로 무장투쟁 개시를 선언했다. 그러나 지도자 게오르기오스 그리바스를 놀라게 한 것은 같은 날 밤 그리스 국영 라디오가 키프로스에서 벌어진 공격을 '테러 사건'이라고 보도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바스는 마카리오스 대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분노를 토로했다. "'조국의 목소리'(아테네 방송)의 방송 내용 문제로 다시 말씀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 방송은 어제보다 더 심했습니다. 심지어 '자유는 테러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간디가 그런 수단으로 인도의 해방을 이루지 못했듯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저와 함께 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얼어붙었고, 계속 싸워야 할지조차 의문을 품습니다."
터키의 등장과 이스탄불 포그롬
결국 그리스의 '동맹국'들은 오랜 숙적인 터키를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1955년 9월 6일, 터키 폭도들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에게 전례 없는 학살, 이른바 '9월 6일 포그롬'을 자행했다. 한편 키프로스 문제를 두고 파파고스는 가장 가까운 측근인 스피로스 마르케지니스와도 의견이 맞지 않았다.
파파고스의 죽음과 암살설
그리스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파파고스가 병을 얻어 1955년 10월 4일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스 좌파 신문 '리조스파스티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955년 10월 4일 파파고스가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에 대해서는 많은 글이 쓰였다. 언론에서는 키프로스 문제와 관련한 영국의 정책에 대한 이견 때문에 영국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파파고스는 키프로스 문제의 유엔 호소에 찬성했고 실제로 실행했는데, 이는 영국이 반대하던 사안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는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파파고스와 영국의 관계는 1941년부터 긴장 상태였으며, 메탁사스처럼 이 원수(元帥)는 지중해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하려던 영국에게 매우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영국은 1956년에는 수에즈 침공까지 감행할 정도로 지중해 패권에 집착하고 있었다.
카라만리스로의 교체
파파고스의 죽음은 미국과 영국에게는 장애물 하나가 사라진 것과 같았다. 후임으로 집권한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는 피피넬리스 각서를 바탕으로 키프로스 문제에 훨씬 더 유연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