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이란?
신성 로마 제국은 본질적으로 서로마 제국을 되살리려는 시도였습니다. 11세기에는 '로마 제국', 12세기에는 '신성 제국'이라 불렸으며, 13세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제국의 국경은 긴 역사 속에서 놀랍도록 확장되었지만, 게르만 계열 국가들은 언제나 제국의 핵심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10세기 이후 제국의 통치자들은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으며, 대개 교황에게서 로마에서 황제로 즉위하는 관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황제 자리의 공백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면서 로마의 황제 자리는 공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의 정치·법적 구조는 5~6세기에 걸쳐 붕괴했고, 그 빈자리는 게르만 귀족들이 다스리는 독립된 왕국들로 대체되었습니다.
격동의 초기 중세 시대 동안, 교회의 영적 왕국과 공존하는 세속 왕국이라는 전통적 개념은 교황청에 의해 장려되었습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현 터키 이스탄불)을 수도로 삼고 동로마 제국의 속주들을 통치하던 비잔틴 제국은, 옛 서방 영토에 대해 명목상 주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들을 정복한 많은 게르만 부족들 역시 비잔틴 황제를 자신들의 군주로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롬바르드족의 위협으로부터 비잔틴의 보호를 받는다는 의존 관계 등 여러 요인 때문에, 교황들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강제 폐위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비잔틴 제국과 교황청의 결렬
6~7세기에 걸쳐 게르만 부족들의 융합으로 일련의 독립적인 기독교 국가들이 탄생하면서, 비잔틴 황제들의 서방에서의 정치적 권위는 사실상 소멸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서방 교회 분열의 종교적 파장이 본격화되었으며, 특히 교황 그레고리오 1세(재위 590~604) 시대에 두드러졌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정치적 위상이 추락하면서 교황청은 콘스탄티노플의 세속 및 교회 당국이 서방 교회의 업무와 활동에 개입하는 것에 점차 반감을 드러냈습니다. 양측 교회 간의 적대감은 비잔틴 황제 레오 3세 이사우리아(재위 717~741)가 기독교 예식에서 성상 사용을 폐지하려 했을 때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레오의 칙령에 대한 교황청의 저항은 730년부터 732년 사이 콘스탄티노플과의 결별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교황청은 서로마 제국을 부활시킨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교황들은 직접 이 사업에 착수하여 미래 국가의 지도권을 장악할 가능성까지 고려했습니다.
샤를마뉴 대제의 대관식
그러나 교회는 어떠한 군사력도, 실질적인 행정 조직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이탈리아의 롬바르드족과의 적대 관계로 인해 큰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결국 교회 지도부는 세속 왕국과 영적 왕국을 하나로 묶으려던 구상을 포기하고, 당시 서유럽의 지배적 정치 세력인 프랑크 왕국에 황제 칭호를 수여하기로 결정합니다.
프랑크의 여러 통치자들은 이미 교회에 대한 충성을 입증한 바 있었습니다. 특히 768년 프랑크 왕위에 오른 샤를마뉴는 773년 롬바르디아를 정복하고 영토를 제국급 규모로 확장하는 등, 황제라는 높은 자리에 걸맞은 뛰어난 능력을 과시했습니다.
800년 12월 25일,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수여했습니다. 이 행위는 하나의 전례를 확립했고, 중앙유럽 정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정치 구조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전례는 교황이 황제를 선출하고, 대관하며, 심지어 폐위할 수 있다는 권리 주장의 근거가 되었으며, 교황은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약 700년간 이 권리를 행사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