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르트 프란츠(Kurt Franz)는 1914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1928년 학교를 그만두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결국 요리사가 되었으며, 각종 극단주의 단체에 차례로 가입한 뒤 1932년 나치당에 입당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에는 SS에 들어가 요리사로 복무했고, 이후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경비 임무를 맡으며 분대장으로 진급했다.
1939년 말, 그는 장애인 등 특수한 필요를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악명 높은 T4 프로그램, 즉 '안락사'라는 미명의 살인 계획을 알게 되었다. 초기에는 다시 요리사로 일하며 직접적인 살인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뀐 것은 1942년, 점령지 폴란드의 벨제츠 절멸수용소에 이어 트레블링카로 파견되면서부터였다.
트레블링카의 괴물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는 소비보르, 벨제츠와 함께 '라인하르트 작전'의 3대 절멸수용소 중 하나로, 최소 70만 명, 어쩌면 그 이상이 이곳에서 학살되었다.
프란츠는 부지휘관으로서 수송열차에서 내리는 희생자들의 하역을 지휘하고, 소지품을 빼앗은 뒤 가스실에 가둬 집단 학살하는 임무를 총괄했다. 동그랗고 순해 보이는 인상 탓에 포로들은 그를 '인형(Lalka)'이라 불렀다. 그러나 전직 요리사이자 현직 SS 상사였던 이 남자는 문자 그대로 '재앙' 그 자체였다.
포로들은 프란츠와 그의 저먼 셰퍼드 '배리'를 몹시 두려워했다. 배리는 포로들을 물어 찢어발기도록 훈련된 개였다. 프란츠는 또한 소련군 출신 포로 출신 우크라이나인 80명으로 구성된 위병대의 지휘관이기도 했다.
할 일이 없을 때면 프란츠는 수용소를 돌아다녔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의 눈에 띄는 포로는 불행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직접 고문을 하거나, 개에게 포로의 음낭을 물어뜯으라고 명령하기 일쑤였다.
프란츠는 '트레블링카 찬가'의 가사를 짓기도 했다. 독일인들이 포로들에게 억지로 부르게 한 이 종말의 노래에는 "트레블링카는 나의 운명, 내게 남은 전부"라는 굴욕적인 가사가 담겨 있었다.
그는 권총이나 소유한 사냥용 소총으로 포로를 직접 죽이는 것을 즐겼다. 증언에 따르면, 적어도 한 명의 포로를 죽이지 않고 넘긴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한다.
권투 선수 출신이었던 그는 종종 권투 시합을 열곤 했다. 힘없는 희생자들을 직접 죽이거나 훈련용 샌드백처럼 사용했고, 더 나아가 로마 시대의 검투를 재현하듯 포로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그는 희생자들을 채찍질하는 것도 좋아했다. 어느 날 유대인 포로 한 명을 보고는 손에 든 양관총으로 등을 쏘았다. 프란츠는 웃으며 쓰러진 피해자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했다. 그러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는데, 음낭이 훼손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짜증을 낸 그는 곧장 새로운 희생자를 찾아 나섰다. 적어도 두 번은 아기를 벽에 내던지거나 발로 차 죽였다.
1943년 그는 소위로 진급했다. 그러나 수용소 봉기가 일어난 날, 그는 다른 SS 장교 4명과 우크라이나인 위병 16명과 함께 부크강에서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봉기 이후 그는 수용소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벌어진 끔찍한 대량 학살의 흔적과 함께 수용소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철거 작업에 동원된 포로들은 작업이 끝나자 그의 명령에 따라 모두 살해되었다.
그가 감당하지 못한 결말
트레블링카 이후 프란츠는 이탈리아로 파견되어 반파르티잔 작전에 참여했고, 전쟁의 종식을 그곳에서 맞았다. 프란츠는 성공적으로 모습을 감췄다. 노동자로 일하다가 뒤셀도르프에서 요리사로 생계를 이어오던 중, 1959년 마침내 체포되었다.
그의 집에서는 '좋은 시절(Gute Jahre)'이라는 제목의 트레블링카 사진첩이 발견되었다. 이른바 '트레블링카 재판'에서 프란츠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단 한 번 포로를 때린 것만을 인정했다.
1965년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93년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되었고, 1998년 부퍼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연루된 범죄의 무게에 비하면 국민의 심판을 피해 간 악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