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성 어거스틴 수도원의 연대기 편찬자 윌리엄 손(William Thorne)에 따르면, 훗날 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가 되는 보르도의 리처드가 1367년 1월 6일 그 도시에서 태어났다. 주현절(Epiphany)에 태어난 아이였기에, 며칠 뒤 거행된 세례식에는 ‘동방박사(마기)’를 상징하는 세 인물이 참석했고, 연대기 작가는 그들을 스페인·나바라·포르투갈의 왕으로 지목했다. 중세인들에게 강력한 상징성을 지닌 장면이었고, 당사자였던 리처드 본인도 생전에 이 이야기를 크게 의미 있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사실일까? 만약 그렇다면 세 왕은 각각 누구였으며, 왜 하필 ‘세 동방박사’라는 중요한 역할까지 맡았던 것일까?

전설의 배경: 카스티야 내전과 흑태자
이야기를 검증하려면 먼저 세례식의 주인공부터 짚어야 한다. 그는 흑태자(the Black Prince) 에드워드와 켄트의 조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바로 훗날의 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다. 만약 세 명의 이베리아 반도 왕이 실제로 아기의 세례식에 참석했다면, 그들이 세례 대상의 부모와 강한 유대를 맺고 있었고 당시 영국 궁정에 머물 만한 이유가 있었어야 한다. 이야기의 개연성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당시 잉글랜드는 카스티야 왕 페드로 1세가 이복형제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와 벌인 왕위 계승 내전에서 페드로 1세를 지원하고 있었다. 1366년 폐위당한 페드로는 당시 잉글랜드령이던 가스코뉴의 흑태자 궁정으로 피신했고, 같은 해 9월 23일 두 사람은 리부른 조약(Treaty of Libourne)을 체결했다. 잉글랜드는 페드로의 왕위 복귀를 돕는 대신,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서 카스티야 함대의 지원을 받기로 한 것이다. 따라서 손이 언급한 ‘스페인의 왕’은 실제로는 카스티야의 왕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나바라 왕의 참석은 가능했을까?
리부른 조약은 연대기가 언급한 나바라 왕이 그 시기 보르도에 있었는지에 대한 단서도 함께 준다.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는 이 조약을 마무리한 협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잉글랜드군과 페드로가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롱스발레스 고개가 열린 채 유지되도록 보장하려면 그의 협조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왕, 마요르카의 하우메 4세?
그렇다면 세 번째 왕은 누구일까? 여러 후보 가운데 하나가 유력한 입후보로 떠오른다. 이를 확인하려면 1367년 롱스발레스 고개를 넘어 반도로 진입한 잉글랜드-카스티야 연합군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의 군대와 조우해 1367년 4월 3일 나헤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페드로 1세와 흑태자 진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독특한 인물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바로 마요르카의 하우메 4세였다. 그는 마요르카 왕 하우메 3세의 아들로, 아버지는 1349년 마요르카 왕위를 찬탈한 아라곤의 페드로 4세의 손에 룩마조르 전투에서 왕위와 목숨을 모두 잃었다. 당시 복잡한 동맹 구도 속에서 페드로 4세는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와 손잡았으므로, 하우메 4세가 왕위 회복을 위해 아라곤의 적들과 손을 잡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하우메가 4월 나헤라 전장에서 페드로 1세와 흑태자 곁에 있었다면, 1월 보르도에서도 그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 자연스럽다. 실제로 일부 사료는 하우메가 리처드 2세의 세례에서 대부(代父) 역할을 맡았다고 전한다.
전설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들
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는 1377년 1월 열린 잉글랜드 의회 의식에서 나온다. 웨일스 공이 된 젊은 리처드가 주관한 이 의식에서 세인트데이비드 주교는 참석자들에게 ‘쾰른의 세 왕’이 그랬듯 왕자를 예우할 것을 촉구했다(본문 대표 이미지는 쾰른 대성당에 안치된 ‘동방박사 유물함’이다). 더욱이 리처드 본인도 이 이야기에 깊이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가 소유한 은세공품 컬렉션 중에는 멜키오르, 가스파르, 발타사르라는 이름이 새겨진 물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반론: 동시대 기록들은 침묵한다
그러나 의문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흑태자가 1월 11일 카스티야 원정을 떠난 사실을 기록한 당대의 목격자 연대기 작가들, 예컨대 장 프로아사르(Jean Froissart)나 샹도스 헤럴드(Chandos Herald)는 세례식에 세 왕이 참석했다는 이야기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결코 놓칠 수 없는 화려한 행사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매우 시사적인 정보를 나바라의 카를로스 국왕 기록 보관소가 제공한다. 페드로 1세의 대의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받던 그는, 나바라 측 기록에 따르면 1366년 12월 29일 흑태자에게 보증하기 위한 여정에 나섰다. 나바라 연대기는 카를로스가 1367년 1월 초 보르도에서 잉글랜드군을 추격해 합류했고, 이후 남하하여 바욘(보르도에서 남쪽으로 185km 떨어진 곳)에 머무르던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를 만난 뒤 1367년 1월 8일 팜플로나로 돌아갔다고 기록한다. 이 날짜들을 비교해 보면, 카를로스 데 나바라는 물론 페드로 1세조차 왕자의 세례식 당시 보르도에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장 프로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리처드의 출생 자체도 상당히 아수라장이었다고 한다. 남편이 결과를 알 수 없는 원정을 떠날 것을 앞두고 불안해하던 켄트의 조앤, 그리고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할지 모른다는 우려 속에 세례식은 급하게 치러졌다고 전해진다.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인가?
흑태자는 1376년 세상을 떠났고, 1년 뒤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마저 서거하면서 겨우 열 살의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게다가 친형마저 어린 나이에 요절한 바 있어, 왕위에 오른 소년의 미래는 밝아 보이지 않았다. 출생 순간 ‘세 동방박사’라는 신성한 개입이 있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꾸며진 것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을 수 있다. 리처드 2세가 스스로 이 이야기에 매달렸을 가능성도 있지만, 모든 정황은 이것이 훗날 만들어진 신화임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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