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전은 우리 시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끔찍한 사례들이 존재해 왔다. 그리스에서는 근세에 약 400년간 이어진 튀르크 지배 기간 내내 산악 지대에서 끊임없는 게릴라전이 벌어졌다."
1808년 스페인 사람들은 나폴레옹 대제의 군대에 맞서 격렬한 게릴라전을 시작했고, 1809년에는 티롤의 오스트리아인들이, 1812년에는 러시아인들이 그들을 본받았다. 좀 더 가까운 시기인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추축국이 점령한 거의 모든 국가에서 해방 운동과 반란 운동이 일어나 비정규전 양상을 띠었다.
베트남, 지형이 강요한 게릴라전
베트남에서는 지형 자체가 주민들에게 이러한 전술을 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중국 제국군과 싸울 때든, 일본군과 싸울 때든, 프랑스 식민 지배자들과 싸울 때든 마찬가지였다. 비정규전은 베트남 전사들에게 제2의 천성처럼 익숙한 것이 되었다.
운명은 이 전법을 결국 미국인들에게도 향하게 했다. 미국은 정치적인 이유로 정규전 전술을 구사해 북베트남을 침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둘 점이 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바로 북베트남을 침공하지 않았고, 하나의 국가 실체로서 북베트남을 해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에게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과 중국의 반응을 두려워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쟁을 확전하는 일은 너무나 위험했던 것이다.
베트콩, 마을부터 장악하다
프랑스군이 축출된 후, 베트콩 반군은 1957년부터 남베트남 영토 안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의 첫 번째 행동은 침입한 마을마다 실질적 혹은 잠재적 반대자들을 최대한 많이 처형하는 것이었다.
마을의 촌장과 교사가 첫 번째 희생자였다. 다음은 지주였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 심지어 중립 성향의 사람들까지 숙청 대상이 되었다. 이 목표가 달성된 후에야 본격적인 군사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미 마을에서 '반동 명문가'가 제거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이 선전 활동을 방해받지 않고 펼치기는 매우 쉬웠다. 문맹자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던 마을 주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 또한 어렵지 않았다.
전선이 없는 전쟁, 사방이 적인 땅
곧이어 군사 작전이 개시되어 상대를 피로하게 만들고 사기를 꺾었다. 매복, 지뢰 매설, 도로 함정, 야영지와 기지에 대한 기습 공격 등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나 있는' 듯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반면 남베트남 병사들은 어디에서도 안전함을 느낄 수 없었다. 베트남에는 정식 의미의 '전선'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전선 뒤에 안전한 아군 지역이 있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참담할 정도로 부실하게 훈련되고, 더 참담하게도 충원·지휘된 남베트남군의 사기는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전쟁은 늦어도 1965년까지는 끝났을 것이다. 초강대국의 개입은 '남베트남'이라는 임종을 맞은 국가 형태에 10년의 수명 연장을 선물한 셈이다. 그리고 미국의 개입 후에도 베트콩은 같은 성공 공식을 계속 적용했으며, 미군의 높은 훈련 수준과 장비에 맞서기 위해 오히려 더욱 교묘하게 진화시켜 나갔다.
모든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에서 진 미국
주목할 점은, 미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단 하나의 전투에서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에서 졌다! 당대 최신 무기와 장비를 갖추었고 병력 훈련도 잘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적을 이길 수 없었다. 적은 조국의 험난한 지형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고, 미국의 압도적 화력이 가져올 소모를 견딜 정신력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콩의 눈에 비친 '호화로운' 병사, 미군
혹독한 시련을 견뎌온 베트콩은 미군을 나쁘지 않은 전사, 그러나 '호화로운(luxury)' 전사라고 평가했다. 그것도 억울하지 않은 평가였다.
그들 스스로는 절대적인 적의 제공권 아래에서 작전하고, 미군 무기의 포격 세례에 대응하며, 땅속의 햇빛 없는 터널 속에서 문자 그대로 두더지처럼 생존하는 법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몇 분 만에 위치를 바꿔 달라고 포병이나 공군에 무전을 보낼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에 의지했다. 조국의 흙, 갈대, 바위, 짐승들이 모두 그들의 공범이 되었다.
수백 명의 미군 병사가 가장 원시적인 무기인 창과 화살에, 뾰족한 대나무로 만든 소리 없는 함정에, 독사 웅덩이에 의해 죽거나 다쳤다.
1년 복무의 한계, 세대 간의 단절
미군 병사 대부분은 베트남에서 불과 1년을 복무했다. 설령 원한다 해도 이런 형태의 전쟁에 적응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소대의 '늙은 병사'들은 새로 들어온 병사들과 친분을 맺는 것을 피했다. 젊은 병사들이 첫 임무에서 죽거나, 경험 부족 탓에 늙은 동료를 목숨을 건 위험으로 몰아넣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승부를 가른 것은 보병이었다
이런 조건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보병, 그리고 지상군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경험이 풍부하고 사기가 극도로 높은 부대여야 했다. 미국식 '경찰 작전' 유형의 소탕 작전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점령해도 유지할 수 없는 땅을 소탕하고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