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90년 레카이온(Lechaio)에서 벌어진 전투는 아테네가 정예 스파르타군을 상대로 거둔 몇 안 되는 대승이었다. 동시에 이 전투는 고대 그리스에서 펠타스트(peltast)라 불린 경장보병이 호플리테스(hoplites) 중장보병을 격파한 가장 인상적인 사례로 기록된다.
코린토스를 집어삼킨 내전의 불씨
새로운 전쟁의 무대가 된 코린토스는 민주파와 과두파 간의 피비린내 나는 갈등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과두파는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나, 결국 패배하여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후원 아래 추방되었던 과두파 세력은 다시 이 지역으로 돌아왔고, 도시 두 항구 중 하나인 레카이온(Lechaion) 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이후 스파르타군과 함께 연합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코린토스 전쟁의 시작
사태의 뿌리는 기원전 395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소위 '코린토스 전쟁'이라 불리는 새로운 내전이 촉발되었다. 이 전쟁에서 한쪽은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이, 다른 한쪽은 코린토스, 테베, 아르고스, 아테네 등의 연합 진영이 맞서 싸웠다.
공화파 코린토스인들과 테베, 아르고스 군이 레카이온 탈환에 실패하자, 아테네 역시 동맹군 지원을 위해 병력을 파견했다. 아테네 펠타스트 부대의 지휘관은 장군 이피크라테스(Iphicrates)였고, 호플리테스 부대는 칼리아스(Kallias)가 이끌었다.
한편 스파르타 역시 용맹한 왕 아게실라오스(Agesilaos) 휘하의 군대를 코린토스로 보냈다. 그는 여러 요새를 점령하고 동맹군의 기동성을 크게 제약하는 데 성공했다.
운명의 행군, 하이킨티아 축제
아게실라오스는 레카이온에 '모라(mora)'라고 불리는 부대(통상 500~600명 규모의 대대급 편제)를 수비군으로 남겼다. 이 모라 병력 중 일부는 스파르타 국가의 근간을 이룬 도시 중 하나인 아밋클레스(Amyclai) 출신이었다.
전통에 따르면 아밋클레스 출신 병사들은 원정 중이라 할지라도 '하이킨티아(Hyacinthia) 축제'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하여 모라 부대 전체가 레카이온을 출발해 아밋클레스 출신들을 시키온(Sikyon) 방향까지 호위하게 되었다.
크세노폰(Xenophon)의 기록에 따르면 스파르타군은 전원이 호플리테스 중장보병이었다. 그들은 경보병 부대를 따로 두지 않았고, 소수의 기병만이 지원 부대로 배속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 점이 훗날 재앙의 씨앗이 되었다.
시키온까지 아밋클레스 출신 병사들을 호위한 모라 부대는 되돌아가 레카이온으로 귀환길에 올랐다. 부대 지휘관은 아무런 문제도 예상하지 못했고, 오히려 일종의 무력 시위로서 코린토스 성벽 바로 앞을 지나가며 행진하기까지 했다.
이피크라테스의 역습
도시 안에 있던 아테네 지휘관들, 즉 호플리테스를 지휘하던 칼리아스와 펠타스트를 이끄는 이피크라테스는 눈앞에서 '행진쇼'를 벌이는 스파르타 모라 부대를 보고 공격을 결심했다.
아테네 호플리테스들이 성 밖으로 나가 전투 대형을 갖추는 동안, 펠타스트들은 라케다이몬(스파르타)군을 추격하며 투창을 퍼붓어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스파르타군은 즉시 돌격하여 펠타스트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훨씬 민첩했던 펠타스트들은 손쉽게 물러나며 공격을 회피했다. 스파르타군은 소용없음을 깨닫고 철수했지만, 이번에는 원거리에서 펠타스트들의 또 다른 투창 공세를 받아내야 했다. 투창 세례를 받으며 아무런 대응책도 없던 스파르타군은 다시 돌격했지만, 같은 장면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스파르타 기병 부대가 나타났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 원인은 기병 지휘관의 명백한 미숙함 때문이었다. 적 펠타스트를 공격해야 할 상황에서 그는 오히려 신중하게 움직이며 호플리테스 측 방면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전멸 직전까지 몰린 정예군
계속된 압박 속에 스파르타군은 인근 언덕으로 후퇴했으나, 칼리아스가 이끄는 아테네 호플리테스마저 접근해 오면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한편 레카이온의 과들파들은 상황을 목격하고 배를 띄워 스파르타군을 구출하려 했다. 배들을 발견한 스파르타군은 더 이상 싸우기를 포기하고 탑승하려고 도주했다.
펠타스트들은 끝까지 추격하며 수많은 병사를 살상했다. 살아남은 스파르타 병사들은 사기가 바닥난 채 레카이온으로 돌아왔다. 전장에는 250명의 시신이 남겨졌다. 부상자 수도 비슷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료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 전역을 뒤흔든 충격
무적의 스파르타 전사들이 패배했다는 소식은 그리스 전역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아게실라오스는 코린토스 방면의 원정을 포기하고 스파르타로 회군했으며, 그가 점령했던 요새 중 세 곳은 아테네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 전투는 단순한 한 번의 패배를 넘어 의미가 깊다. 중장보병 중심의 전통적인 그리스 전술 체계에 균열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고, 이피크라테스가 운용한 기동성 있는 경장보병 전술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정예라는 이름 아래 자만했던 스파르타의 실책과, 이를 놓치지 않은 아테네의 통찰이 만든 역사적 순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