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944년 12월 사태(데켐브리아나) 1부: 그리스 내전의 재점화

1944년 12월 사태(데켐브리아나) 1부: 그리스 내전의 재점화

7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데켐브리아나(12월 사태)'라는 용어에 명확한 정의를 내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따라서 우리는 1944년 12월 3일 일요일부터 1945년 1월 11일 목요일까지 주로 아테네와 아티카 지역에서 벌어진 충돌들을 이렇게 부른다. 형식적으로 데켐브리아나는 1945년 2월 12일 월요일 저녁 7시 35분, 바르키자 협정이 체결되면서 막을 내렸다.

엘리아스 달루미스(Elias Daloumis) 집필

데켐브리아나가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는 76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역사가 온전히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물론 양측에서 수많은 책이 출간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개인적 증언이거나 자신들의 입장과 행동에 대한 정당화, 심지어 선전에 불과하다. 어느 책에서도 원인과 계기, 책임 소재, 결론까지 망라한 완전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일수록 좋은 저작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우리 민족은 이 부분에서 분명하게 실패했다. 우리는 아마도 진실을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다음 글에서 우리가 데켐브리아나의 전체 역사를 담으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해당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사건들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공포와 편견 없이 몇 가지 판단을 제시하고자 할 뿐이다. 어차피 이만큼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는 편견이나 의무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시작

1944년 12월 3일 일요일 오전 11시, EAM(그리스 해방전선)이 주최한 파나테나익 대집회가 시작된다. 정부는 처음에는 이 집회를 허용했다가 결국 금지했었다. 당시까지 가장 큰 규모의 집회 중 하나였고 열정도 넘쳤다. 주최 측이 내린 방침은 "무장 없이 시위한다"는 것이었다. 집회 시작 직전 조지 파판드레우 총리 관저 앞에서 누군가 수류탄을 투척해 부관 경비병 한 명이 사망했음에도, 이 방침은 엄격히 지켜졌다.

현수막과 깃발, 두두크(당시에는 '깔때기'라고 불림)를 든 시위대는 아테네 경찰청으로 향한다. 파네피스테미우 거리와 바실리시스 소피아스 거리가 만나는 교차로였다. 그들은 인파의 규모만으로도 건물을 점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경비 측에서 발포가 시작되었고, 국회의사당에 있던 다른 경찰들도 뒤따라 발포했다. 군중 일부가 충격으로 쓰러졌고, 공황 상태가 번져나갔다.

상황은 영국군 전차와 장갑차가 나타나면서 비로소 진정되었고, 시위대는 이들을 환호하며 맞이했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수습되었다. 정부는 사망 11명, 부상 60명이라 발표했고, EAM은 각각 21명과 140명이라며 반박했다. 냉소적으로 들리겠지만, 그날 사상자가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이후 며칠간 이어질 피해가 그보다 몇 배는 많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데켐브리아나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대립하는 세력들

그렇다면 맞서는 양측은 각각 어떤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가? 11월 30일부터 경계 태세에 돌입한 ELAS(그리스 인민해방군)의 전력은 다음과 같다.

  • 네아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제1군단 사령부
  • 제1여단 — 네아 스미르니, 칼리테아, 네아 코스모스(당시 카치포디)의 제1연대, 카이사리아니, 비로나, 파그라티, 구바(제1묘지 뒤편)의 제2연대
  • 제2여단 — 파티시아, 킵셀리, 기지, 암펠로키포스의 제3연대, 페리스테리, 콜로노스, 네아 스파게이아(오늘날 타브로스), 페트랄로나의 제4연대
  • 할란드리, 마루시, 키피시아의 제5독립연대
  • 피레우스, 드라페초나, 케라치니, 코키니아의 제6독립연대

이 병력의 총원은 8,750명에서 9,000명에 달했다. 무장은 상대적으로 빈약해서 소총 5,000정, 자동화기 300정, 권총 500정, 기관총 10정, 박격포 8문(중대급 2문 + 개인용 6문), 37mm 대전차포 2문, 75mm 포 2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제2사단 — 테베의 제2연대, 칼키다의 제7연대, 엘레프시나의 제34연대로 구성되어 엘레프시나부터 하시아 지역까지 배치, 총 병력 약 2,500명
  • 아테네 ELAS 예비대 — 10,000명 이상으로 추산되지만 실질적으로 무장되지 못한 상태
  • 제3사단 소속 제6연대(코린토스), 제13사단 소속 제5/42연대(암피사)와 제52연대(도모코스)는 아테네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부 측이 확보한 병력은 다음과 같았다.

  • 박격포와 기관총이 없는 3개 대대 규모의 제3산악여단(ΕΟΤ)
  • 화포가 없는 제3야전포병연대
  • 사실상 사단 규모였던 제6수비연대

이 모든 병력은 오늘날 ASDYS가 자리한 구디 병영에 주둔하고 있었다.

  • 아테네와 피레우스의 각 경찰서 및 관련 부서에 분산 배치된 약 2,500명의 도시경찰
  • 역시 여러 부서에 나뉘어 배치된 약 3,000명의 헌병

제3산악여단을 비롯한 정규 군부대 병력들은 무장과 훈련 상태가 양호했고 전투 경험도 풍부했다. 반면 경찰과 헌병 병력들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무했고, 장비도 매우 열악했으며 아테네와 피레우스 곳곳의 부서와 시설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부 측의 가장 강력한 전력은 영국군 부대들이었다.

  • 셔먼 전차 25대와 험버 장갑차 23대를 보유한 제23장갑여단 — 파라피그마타(오늘날 니미츠 군병원, 콘서트홀, 옛 ETA/ESA 부지, 해군병원, 미국 대사관이 위치한 곳)에 주둔. 산하에 제46·제50전차연대, 25파운더 포 8문을 운용하는 제463야전포병중대, 화포 없는 제64경포병중대(1개 중대는 아베로프 감옥 경비, 또 다른 1개 중대는 키피시아 수도회사 펌프장 주둔)가 속해 있었다. 수송중대, 공병중대, 통신중대도 파라피그마타에 함께 배치되었다.
  • 2개 대대만 보유한 제139보병여단 — 네아 팔리로의 카라이스카키 필드(당시 '싸이클 트랙'이라 불림)의 더럼 경보병 연대, 피레우스 스카파키의 레스터셔 연대
  • 제2공수여단 — 팔리로 델타 공군 시설(현재 폐쇄된 태권도 경기장 부지)의 제4대대, 연대 숙소의 제5대대, 오모니아 호텔에 1개 중대와 프시히코(대학 부지)에 1개 중대를 둔 제6대대. 세 대대 모두 각 2개 중대씩만 보유했다.

마지막으로 화포가 없는 제64경대공포병연대가 피레우스 지역의 여러 시설(예컨대 팔리로 현에 있는 전력회사 공장)을 경비했다. 또한 앞서 언급한 팔리로 공군 시설에는 영국왕립공군(RAF) 제2902비행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 군사 병력은 약 2,500명의 그리스인과 4,500명의 영국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아테네 지역에는 거의 모든 그리스 작가들이 언급조차 하지 않는 정부군이 더 존재했다. 바로 해군과 공군 부대로서, 이들은 여러 차례 작전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해군 함선 다수가 소수의 영국 군함과 함께 주로 피레우스 항구 밖에 정박해 있었다. 함대 사령부는 해군사관학교에, 피레우스 해군행정부는 미아울리 해안의 바티 저택에, 그리고 한 개의 해군 부대는 투르콜리마노스 해군클럽 인근에 배치되어 있었다.

헬리니콘 공항(당시에는 '하사니'라고 불렸고 영국 문서에는 '칼라마키'로 기록됨)에는 RAF 제337윙이 주둔하고 있었다. 산하 비행대대는 다음과 같다. 스피트파이어 Mk.V를 보유한 제32·제94비행대대, 보파이터 Mk.VI를 보유한 제108비행대대, 다코타 Mk.IV를 보유한 제216비행대대, 웰링턴 Mk.XIII를 보유한 제221비행대대. 같은 영국 지휘 아래 제335·제336·제13 그리스 비행대대(앞의 두 대대는 스피트파이어 Mk.V, 세 번째는 발티모어 Mk.V 장비)도 있었지만, 이들은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모든 정부군은 로널드 매켄지 스코비(Lt. Gen. Sir Ronald MacKenzie Scobie, 1893–1969) 중장의 통합 지휘를 받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