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은 왜 비잔티움을 구하지 않았는가?
서방은 왜 비잔티움을 도와주지 않았는가? 이 질문은 오랫동안 역사가들을 괴롭혀 온 숙제였다. 지금까지 제시된 답변은 다양하다. 그리스에서는 비잔티움이 교황청에 복속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서방인들이 원조를 거부했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 아마도 가장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사실 서방에는 비잔티움을 지원하려는 분위기 자체가 없었다.
서방이 원조에 소극적이었던 데에는 '광신적인' 정교회 국가 비잔틴 그리스인이 교황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으려 했다는 종교적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방 각국 간의 경쟁 관계와 경제적 이해관계 역시 그리스인을 강하게 만들지 않도록 작용했다. 당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백년전쟁으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고, 이탈리아의 해양 공화국들은 서로 치열한 상업 경쟁을 벌이며 오로지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장 확보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들의 계산
한편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들은 비잔티움 제국이 다시 강대국으로 부상하여 해상 패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13세기와 14세기 내내 이들은 비잔티움의 해군력 붕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상징적인 예로,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유럽으로 수입되는 물품에 부과되는 관세의 거의 전부가 갈라타(페라)의 제노바인들과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징수되고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재정적으로 비잔티움을 착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나라를 강화시킬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들 역시 '도시(콘스탄티노플)'가 그리스인의 손에 남아 있기를 바랐다. 투르크에게 도시가 넘어가면 기존의 경제 협약이 재검토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방인들에게, 동방과 직접 접촉하던 이탈리아인들조차, 비잔티움이 투르크에 항복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먼 미래의 일처럼 보였다. 바다와는 무연한 투르크족이 함대 없이는 도시를 함락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교황의 한계
중세 후기 유럽의 세 번째 권력 축인 교황은, 정교회가 자신의 명령에 복속하는 조건으로 몰락해 가는 비잔티움을 지원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리 진심으로 바랐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가 큰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교황의 명령만으로 수천 명의 서유럽인이 '신앙'을 위해 싸우러 달려나가던 시대는 이미 저물었던 것이다. 몇 세기 뒤 스탈린이 말했듯이, “교황은 좋지만, 그에게 사단이 몇 개나 있는가?”였다. 당시 교황에게는 사단도 없었고, 서방 정치에 대한 중대한 영향력도 없었다.
고립된 도시, 고갈된 군사력
그렇다면 그리스 측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한마디로 극히 제한적이었다. 수입이 적고 세계로부터 고립된, 불신의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섬과 같은 도시는 더 이상 과거의 영화와 화려함도, 당면한 상황에서 생존하는 데 필요한 군사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멸망 약 100년 전 안드로니코스 3세 시절, 마지막 팔레올로고스 황제들이 운용할 수 있었던 정규군의 총수는 3,000명을 넘지 않았다.
이 숫자는 점차 더 줄어들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시코(Boucicaut)의 동방 원정이다. 1398년 프랑스 출신의 부시코는 기병 100명과 보병 1,100명을 이끌고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에게 고용되었다. 이 적은 수이지만 정예 장비를 갖춘 베테랑 부대로 부시코는 트라키아에서 투르크를 거의 소탕할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재정적 지원이 부족하자 그는 다음 해 프랑스로 떠나 버렸다. 비잔티움은 1,200명의 병력조차 유지하지 못할 만큼 피폐해져 있었던 것이다.
정규군 외에도 일종의 '민병대'라 할 수 있는 무장 가능 연령의 시민들이 존재했으며, 필요할 때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제대로 된 장비도 없었고, 무엇보다 군사 훈련과 경험이 결여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들을 병사로 훈련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들 모두의 최우선 관심사는 생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전쟁과 투르크의 약탈로 유린당한 농경지는 방치되어 있었다. 투르크의 세력 확장은 비잔티움 영토를 콘스탄티노플, 에피바테스, 실리브리아 주변으로 축소시켰다. 경제 붕괴는 필연적으로 생활 수준의 하락, 즉 빈곤으로 이어졌다.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수천 명이 각지의 수도원으로 피신했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콘스탄티노플 자체의 인구는 외국인을 포함해도 4만~7만 명에 불과했다.
유일한 희망, 모레아(펠로폰네소스)
유일한 희망의 빛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곳의 상황도 겉보기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여러 영주들과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데스포테스(전제공)들 사이의 불화는 물론, 황실 가문 구성원들 간의 내분마저 존재했으며, 이 불화는 결국 민족적 대업에 치명타를 안겼다. 게다가 펠로폰네소스 역시 최후의 포위전 때든 그 이전이든, 포위된 '여제 같은 도시'를 지원할 만한 인적·재정적 자원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했다.
데스포테스의 정규군은 소수였으며, 병력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여기에 각 데스포테스는 소수의 프랑크 용병을 추가했는데, 이들이 군대의 최정예를 이루었다. 또한 데스포테스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경기병, 즉 유명한 '스트라티오티'를 보유했는데, 현대 서구 역사가들은 이들을 '알바니아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전제공국 군사력의 대부분은 단순한 농민, 즉 자작농이거나 '유력자'들의 소작농이었다. 이들에게는 콘스탄티노플의 '민병대'에 대해 말한 것과 같은 평가가 그대로 적용된다. 주무장이 활에 불과하고 흉갑도 갖추지 못한 채, 적 기병의 돌격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지닌 이들은 은밀한 게릴라전 임무나 공성전에는 유용했지만, 정면 대치 전투에는 부적합했다. 게다가 이들은 통상 지협을 넘어 원정에 나가는 것조차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