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세기 비잔틴-아랍 전쟁은 그 강도를 줄이지 않은 채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는 아랍 측이 크게 우위에 있었던 시기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잔틴은 적진 한가운데, 이집트의 항구 도시 다미에타에서 감행된 '과감한' 작전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광신적인 무슬림 아랍인들은 시칠리아 일부를 점령했고, 더욱 중요하게는 동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큰 섬 크레타를 장악하며 지중해에서 지배력을 크게 확장해 나갔다. 크레타에는 9세기 초 안달루시아 출신 망명자들이 세운 아랍 토후국이 들어섰고, 이곳은 이후 수십 년간 비잔틴 해운과 연안 지역을 위협하는 해적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크레타 고립 전략
크레타의 아랍인들은 주로 이집트를 통해 압바스 칼리파국의 지원을 받았다. 따라서 비잔틴 입장에서 이 지역에 대한 성공적인 타격은 절실하고도 논리적인 선택이었다. 비잔틴은 여러 차례 크레타 탈환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제국은 전략을 변경했다. 새로운 목표는 정면 공격 대신, 이집트와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북아프리카 연안의 크레타 토후국 보급기지들을 파괴함으로써 크레타를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당대 저명한 비잔틴 학자 알렉산더 바실리예프에 따르면, 다미에타는 곧 "크레타의 무기고"였다. 이 무기고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했다. 아랍 측 사료에 따르면 황제 미카엘 3세는 지중해의 세 개 아랍 거점을 동시에 공격하기 위해 총 300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세 개 함대의 출항을 명령했다. 나머지 두 함대의 목표지가 어디였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세 번째 목표는 분명 다미에타였다.
기습 작전
비잔틴군은 병사 5,000명을 실은 85척의 함선으로 다미에타를 향해 출항했다. 아랍 측 사료는 함대의 지휘관을 '이븐 카투나'라고 기록하는데, 이는 황제 미카엘 3세의 측근이자 심복인 귀족(파트리키오스) 다미아노스로 추정된다. 다미아노스 대신 다른 인물을 지목하는 견해도 있지만 뚜렷한 근거는 없다. 흥미롭게도 비잔틴 측 사료는 이 작전에 대해 많은 언급을 남기지 않았다.
이 시기 이집트 해군은 쇠퇴기를 맞고 있었다. 연안 방어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크레타와 시칠리아에서의 승리 이후 무슬림들 사이에는 잘못된 안도감이 만연했고, 대부분의 연안 요새는 방치된 상태였다. 그러나 다미에타만큼은 강력한 경비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문제는 서기 853년 5월 22일, 그 경비 부대가 라마단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는 것이다.
번개 같은 상륙과 약탈
비잔틴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정확한 첩보를 입수한 듯, 바로 그날 다미아노스와 그의 함대가 다미에타 항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번개 같은 기동으로 병사들이 상륙했고, 순식간에 도시는 거의 저항 없이 함락되었다. 비잔틴군은 즉시 창고 지역으로 돌진해 크레타로 보낼 예정이던 막대한 양의 무기와 군수 물자를 발견했다. 이 모든 물자는 약탈되어 배에 실렸고, 여성들과 다수의 콥트 기독교인들 또한 포로로 끌려갔다.
이미 주민 대부분이 떠나버린 도시는 비잔틴군에 의해 철저히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비잔틴군은 5월 23일까지 다미에타에 머문 뒤, 폐허만 남긴 채 항해를 떠났다.
우스툰 요새 함락
그리고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미아노스의 함대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강력한 요새 우스툰을 공격해 이마저 함락시켰다. 요새 안에는 역시 크레타로 보낼 예정이던 수많은 공성 무기들이 저장되어 있었고, 이들 역시 모두 불태워졌다.
이 원정은 무슬림 세계에 큰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으며, 이후 이집트 연안 방어가 대폭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작전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해상 기습 중 하나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