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4월 14일 제2공화국 선포부터 1933년 11월 총선까지 약 2년 7개월간 지속된 '개혁주의 2년(Bienio Reformista)'은 스페인 국가 전반에 걸쳐 다방면의 변화와 개혁이 시도된 시기였다.
민주적 전환의 궤적과 한계
공화정은 자유로운 선거 실시와 새 헌법 제정 과정을 통해 민주적 행보를 명확히 했다. 그러나 짧은 기간 안에 정교분리를 일반화하고 낙후된 농업 구조를 근대화하려는 시도는 적잖은 난관에 부딪혔다.
아사냐의 군 개혁: 기술적 완성과 정치적 고립
임시 정부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자마자 아사냐(Manuel Azaña)는 기술적 관점에서 흠잡을 데 없는 군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군대 자체의 근대화도 수반되지 않아 군부 내부의 반감과 적대감만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공화국은 출범 첫 2년 만에 교회, 대지주, 군부 일부라는 강력한 세 집단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공화정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치명적인 대가가 되었다.
사회 개혁: 교육과 세속화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려는 조급함 속에 공화국은 야심 찬 교육 계획을 추진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7,000명 이상의 교사를 양성하고 1만 개 이상의 신설 학교를 설립했다. 이때까지 스페인 교육을 사실상 독점해 온 가톨릭 교회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헌법 조항에 따라 종교 단체의 교육 활동이 금지되고 예수회가 해산되었다. 이혼 법제화, 민립 묘지법 승인, 공공 영역에서 종교의 입지를 좁히는 일련의 조치들은 가톨릭 신자들을 신생 공화국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결집시켰다.
농지 개혁: 의지와 현실의 괴리
1932년 9월 승인된 농지 개혁법은 귀족 대지주 손에 집중된 토지 소유를 재분배하고자 했다. 대토지 몰수와 몰수지에 소작농 정착을 양대 축으로 삼았으나, 이해당사자들의 격렬한 저항과 관료적 절차의 지체로 실질적 진전은 더뎠다. 그럼에도 이 시도는 공화국을 유력 사회 세력과 다시 한번 정면으로 충돌하게 만들었다. 장교 과잉과 정치 개입이라는 고질적 병폐를 안은 군대 개혁도 병행되었으나 마찬가지 난항을 겪었다.
영토 문제: 카탈루냐·바스크·갈리시아 자치법정의 탄생
사회·경제 개혁과 더불어 영토 문제, 특히 카탈루냐 자치 요구는 공화정 정치의 또 다른 핵심 축이었다. 19세기 말, 특히 1898년 '재앙(스페인-미국 전쟁 패배)' 이후 카탈루냐 일부 사회 계층과 바스크·갈리시아에서도 문화적 차별성의 인정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카탈루냐 지역주의 연맹(Lliga Regionalista)
알폰소 13세 치세 동안 카탈루냐 정치권은 보수 부르주아 정당인 '지역주의 연맹'을 중심으로 결집해 스페인 중앙 정치에 적극 참여했다. 프라트 데 라 리바(카탈루냐 연구원 창립자)가 1917년 사망할 때까지, 이후 프란세스크 캄보가 이끌었다. 연맹과 왕정의 유착은 좌파 카탈루냐 세력이 공화정 수립을 주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탈루냐 국가 선포
아시온 카탈라나(Acció Catalana)의 카라스코 포르미게라, 아시온 레푸블리카나 데 카탈루냐(Acció Republicana de Catalunya)의 마티아스 마요르, 에스타트 카탈라(Estat Català)의 자우메 아이구아데르 등이 산세바스티안 협약에 참여했다.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카사레스 키로가(ORGA)도 지방주의 대표로 합류했으나, 전통주의에 뿌리내린 바스크 민족당(EAJ-PNV)은 서명하지 않았다. 4월 14일 공화국 선포와 함께 에스케라 레푸블리카나 데 카탈루냐(ERC) 공동 창당자 프란세스크 마시아 대령이 카탈루냐 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이베리아 연방 결성을 호소했다. 마시아의 돌발 행동에 놀란 임시 정부는 마르셀리노 도밍고, 니콜라우 돌베르 두 카탈루냐 출신 장관과 사회당 페르난도 데 로스 리오스를 바르셀로나로 급파해 신생 체제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는 사태를 진화하려 했다.
카탈루냐 자치법정 승인

세 장관은 마시아를 설득해 산세바스티안 협약대로 공화정 헌법에 카탈루냐 자치를 명문화하고 의회에서 자치법정을 승인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합의했다. 헌법 통과 전까지 마시아는 사실상 자치 정부 역할을 하는 '제네랄리타트(Generalitat)' 의장을 맡았고, 루이스 콤파니스는 바르셀로나 민정장관을 거쳐 아사냐 내각에서 해군장관이 되었다. 1932년 5월~9월 의회에서 자치법정안이 격론 끝에 심의되어 9월 15일 최종 승인되었다. 1934년 10월 혁명(후술) 이후 제네랄리타트는 해산되었고, 1936년 2월 인민전선 선거 승리로 복권되었다.
바스크·갈리시아 자치법정
바스크 자치법정은 나바라의 불참과 알라바에서 1933년 11월 국민투표 과반 미달로 난항을 겪다 내전 발발 후인 1936년 10월에야 승인되었다. 갈리시아 자치법정은 1936년 6월 국민투표를 통과했으나 의회 심의 전에 내전이 터져 논의되지 못했다.
1932년 8월 산후르호 쿠데타 미수

공화국 선포 후, 특히 헌법 승인과 아사냐 총리 취임 이후 모든 개혁 결정마다 강력한 적을 양산했다. 감격적인 4월 14일부터 불과 16개월 만인 1932년 8월, 호세 산후르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개혁 피해 계층의 부추김, 정치적 상황, 공화국 편에 섰던 자신이 민경대 사령관에서 해임된 데 대한 앙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세비야에서 거병해 타 부대의 동참을 기다렸으나 치밀하지 못한 계획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신생 정당들의 등장과 정치 지형의 재편
가톨릭 우파는 위기감을 느껴 정치 세력화에 나섰다. 1932년 말 힐 로블레스 주도하에 '스페인 자치 우파 연맹(CEDA)'이 창당되어 공화정의 개혁, 특히 종교 문제에 맞서 입헌주의를 넘어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나 살라자르의 포르투갈 같은 비다원주의 체제를 지향했다. 농민과 도시 중산층을 기반으로 '종교 수호(공화파 대비)', '재산권 수호(사회당 대비)'를 내걸고 정부 전복과 헌법 개정에 총력을 기울였다.
파시스트 계열 단체도 주변국보다 늦게 스페인에 상륙했다. 1931년 라미로 레데스마와 오네시모 레돈도가 '국가생디칼리스트 공격 평의회(JONS)'를 결성해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했고, 1933년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의 '스페인 팔랑헤'가 합류해 1934년 'JONS 팔랑헤 에스파뇰라(FE de las JONS)'로 통합되었다. 이들은 폭력과 암살로 불안정을 조장해 이념을 강요하려 했으나, 1933년 총선 2석, 1936년 총선 0.5% 미만 득표로 지지 기반은 미미했다.
무정부주의 계열 노동조합 '국가노동연맹(CNT)'의 대결적 투쟁은 공권력의 폭력적 진압(카사스 비에하스 사건, 농민 14명 사망)과 끊임없는 파업·충돌을 낳아 공화정을 옥죄었다. 공산당도 1933년 총선 1석 획득에 그쳤으나 볼셰비키 강령과 혁명 노선으로 파시스트 세력과 거리에서 격렬히 충돌하며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아사냐 정부 위기와 조기 총선

1929년 대공황 여파로 실업이 급증한 경제 위기, 교회의 개혁 되돌리기 총공세, 카사스 비에하스 사건 이후 좌파와 사회당 양쪽에서 집중 포화를 맞은 아사냐의 입지 약화, 알칼라 사모라 대통령의 압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통령이 아사냐에 대한 신임을 철회했다. 아사냐 실각 후 레루가 내각 구성에 실패하자 의회 해산, 1933년 10월 8일 마르티네스 바리오 신임 총리 임명, 조기 총선 소집으로 이어지며 '개혁주의 2년'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