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테르모필레 전투의 영웅들과 배신자,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비극

테르모필레 전투의 영웅들과 배신자,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비극

세계사의 분수령, 테르모필레 전투

테르모필레 전투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자, 용기와 희생정신의 영원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 전투는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전사들과 함께 기억된다. 그러나 최후의 싸움에서 스파르타인들은 홀로 있지 않았다. 초기 사료들은 테르모필레에서 싸우다 쓰러진 그리스군의 정확한 규모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를 따른 약 900명의 헤일로타이(종속 병력)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보이오티아의 작은 도시 출신 700명의 테스피아이인과 그 추종자들의 참전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레오니다스: 늙지 않은 용기

전투의 주역은 단연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였다. 기원전 540년생인 그는 전투 당시 이미 60세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러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테르모필레를 지킬 그리스 연합군의 지휘를 맡는 것을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페르시아군이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했을 때, 그는 유명한 대답을 남겼다. "몰론 라베(와서 가져가라!)"

페르시아군에게 포위당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레오니다스는 다른 모든 병사들을 철수시키고, 자신과 300명의 전사(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만이 후위부대로서 테르모필레에 남기로 결심한다. 이때 자발적으로 남기를 택한 이들이 바로 테스피아이의 700명이었다. 보이오티아의 작은 도시 테스피아이 출신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스파르타인들 곁에 서기로 한 것이다. 한편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레오니다스는 테바이인 400명을 무력으로 붙잡아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 정보는 의문시된다.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던 시점에 무장한 중장보병(호플리테스) 400명을 강제로 통제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테바이인들이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설령 그렇다 해도 전투의 혼란과 학살 속에서 그마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최후의 전투: 사자처럼 싸운 그리스인들

테스피아이인들을 이끈 지휘관은 디아드로모스의 아들 데모필로스였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스파르타인들 곁에서 죽음을 선택했다. 다른 그리스 군대가 마침내 떠나자, 레오니다스는 수세적인 방어에 머물지 않고 적은 병력으로 페르시아 대군을 향해 과감히 공격에 나섰다. 그리스인들은 문자 그대로 사자처럼 싸웠다.

레오니다스는 전투 중 전사했고, 그의 시신을 둘러싸고 호메로스 시대를 연상시키는 격전이 벌어졌다. 페르시아인들은 네 번이나 그의 시신을 빼앗으려 했지만, 네 번 모두 스파르타인과 테스피아이인들이 되찾아냈다.

그리스인들은 창으로 싸웠다. 창이 부러지면 칼로, 칼이 무뎌지면 방패와 투구로, 돌과 나무토막으로, 주먹과 이로까지... 마침내 포위당하자 그들은 콜로노스 언덕으로 물러나, 그리스의 명예와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디에네케스: "그럼 우리는 그늘에서 싸우겠군!"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최후의 전투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스파르타의 디에네케스였다. 전투 전, 누군가 페르시아의 화살이 너무 많아 태양을 가릴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죽음을 경멸하듯 답했다. "좋군, 그럼 우리는 그늘에서 싸우면 되겠네!"

흥미롭게도 디에네케스는 원래 이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전쟁에 나가는 스파르타인은 반드시 가계를 잇는 아들을 둔 자여야 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없던 그는 노예 여성에게 자신의 아들을 낳았다고 거짓 진술하게 만들어 참전 자격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디에네케스는 전투 내내 활약했고, 수천 명의 적을 상대로 레오니다스 왕의 시신을 끝까지 방어하다가 마침내 쓰러졌다.

함께 이름을 남긴 용사들

헤로도토스는 오르시판토스의 아들인 스파르타 형제 알페이오스와 마론의 용맹함도 강조하며, 테스피아이 출신 아르마티데스의 아들 디티람보스의 이름을 별도로 언급한다. 그 역시 끝까지 용감하게 싸웠으며, 테스피아이인의 지휘관 데모필로스가 최후의 지휘를 맡았다고 전해진다.

살아남은 자들의 그늘: 아리스토데모스와 판티테스

300명 중 최소 한 명, 어쩌면 두 명이 목숨을 건졌다. 첫 번째는 아리스토데모스로, 눈병을 앓던 그는 에우리토스와 함께 전투에서 이탈해 있었다. 그러나 에우리토스는 거의 실명에 가까운 상태로도 전장으로 복귀해 싸우다 전사했다. 아리스토데모스는 스파르타로 돌아왔고, 이후 플라타이아 전투 때까지 온갖 멸시와 불명예 속에 살아야 했다. 플라타이아에서 그는 영웅적으로 싸워 피로써 명예를 회복했고, 중상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는 다시 페르시아와 싸웠다고 한다.

300명 중 두 번째 생존자로 판티테스가 언급되는데, 그는 레오니다스의 명으로 테살리아에 파견되어 있었다. 동료들이 영광스럽게 전사하는 동안 홀로 살아남은 수치를 견디지 못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배신자 에피알테스

이 전투의 어두운 주인공은 트라키스(오늘날 프티오티다의 헤라클레이아) 출신 에피알테스였다. 세월이 흐르며 '배신'의 동의어가 된 그의 이름처럼, 에피알테스는 거액의 보상을 받고 산길을 통해 페르시아군을 그리스군의 배후로 인도했다. 델포이 암픽티오니(성소 연합)는 그의 체포에 현상금을 걸었고, 전투 수년 후 그는 고향 사람의 손에 살해당했다. 일부 사료는 에우보이아 출신의 오니테스와 안티키라 출신의 코리달로스를 배신자로 언급하기도 하지만, 이는 확증된 기록이 아니다.

고르고: 스파르타 여인의 품격

마지막으로 고르고, 즉 레오니다스 왕의 아내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에게서 유명한 말이 나왔다. "방패와 함께 돌아오거나, 방패 위에 실려 돌아오거나."

레오니다스가 전쟁터로 떠날 때 고르고는 남편이 전사할 경우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레오니다스의 대답은 이랬다. "훌륭한 남자와 결혼하여 훌륭한 자식을 낳아라."

또 하나 고르고에게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아테네 여성이 "스파르타 여인들은 어찌하여 남자들에게 발언권을 가지는가"라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스파르타의 여인만이 진정한 남자를 낳기 때문입니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영웅들과 배신자,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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