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사라피스: EAM이 미래의 ELAS 지도자를 '배신자·인민의 적'이라 규탄한 1943년 성명

"우리는 테살리아 인민과 온 그리스 인민 앞에서, 몰수된 두 장교의 파일로 완벽하게 입증된 사라피스(Sarafis) 장군과 코스토풀로스(Kostopoulos) 소령의 배신 행위를 규탄한다."

1943년 3월 24일, 그리스 저항 세력 EAM(민족해방전선)의 범테살리아 위원회가 발표한 이 성명은, 당시 ELAS(그리스 인민해방군)의 포로였던 스테파노스 사라피스 대령을 향한 통렬한 고발장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남자는 얼마 뒤 ELAS의 최고 군사 지도자로 추대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EAM이 들고 나온 다섯 가지 혐의

1. 이탈리아 당국이 발급한 '특별 여행 허가증'

성명에 따르면 사라피스는 점령당국 관료 첼로조스(Tzelozos)의 서명을 받아 그리스 전역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허가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라리사–트리칼라 지역의 카라비니에리(이탈리아 헌병)를 정식으로 방문했고, 이탈리아 장교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상근 지휘관은커녕 이름난 영화 감독도, 최하급 예비 장교나 위생 장교조차 이탈리아 당국으로부터 이동 허가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EAM의 논리였다. 라리사에서 트리칼라로, 볼로스에서 라리사로 넘어가는 것 하나조차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사라피스가 누린 후한 허가는 곧 그가 점령자의 이익에 부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2. 네 번 체포되고 네 번 풀려난 장교

성명은 지난 한 달간 사라피스가 이탈리아인들에게 네 번 체포되었지만 네 번 모두 석방되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대부분의 그리스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진정한 애국자로 평가된 이들은 단 한 명도 풀려나지 못했다. 배신하고 투항한 동료들(베카로풀로스 등)만이 석방되었다. 신키스 카차로스는 터무니없는 혐의로 최근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피루스와 테살리아의 수백 명 시민들은 인질로 이탈리아행 배에 실렸다.

그런데도 사라피스는 게릴라 전쟁으로 인해 이탈리아인들에게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던 테살리아에서 완전한 이동의 자유까지 보장받으며 풀려났다.

3. 매국 현직 현지사와의 공공연한 유착

트리칼라에 도착한 사라피스는 서테살리아 인민의 '매국 현지사 겸 집행관'인 사란티스(Sarantis)와 긴밀히 협력했다. EAM은 그 현지사가 '몰래 애국자'인 척할 수는 있겠지만, 점령당국이 현지사의 '환상적인 요원'에게 속아 넘어갈 만큼 순진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의혹을 강조했다.

4. 소문이 자자했는데도 잡히지 않은 '산속 회동'

사란티스의 편의로 사라피스는 산으로 올라가 코스토풀로스와 그의 장교들을 만났다. 이 회동 소식은 트리칼라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음에도, 그가 도시로 돌아왔을 때 이탈리아인들은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 그는 원하는 만큼 도시에 머문 뒤 다시 핀도스 산맥으로 올라갔고, 정복자를 치는 대신 억눌린 인민을 탄압하는 코스토풀로스 같은 반동 세력 무리의 수장으로 자리매김했다.

5. 팡갈로스 특사 자임과 정치적 밀약

결정적인 폭로는 다음과 같다. 코스토풀로스와 그의 간부들(EAM 지지자로서 당시 이미 ELAS 편제에 들어간 이들 포함)이 참석한 첫 회동에서, 사라피스는 스스로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그는 첼로조스의 승인 하에, 테살리아의 ELAS 반군 부대를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해체시키기 위해 전직 독재자 테오도로스 팡갈로스(Theodoros Pangalos) 장군의 대표 자격으로 테살리아에 왔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인들은 3,000명의 그리스 헌병을 팡갈로스–사라피스 측에 제공할 예정이었다. 이 배신의 대가는 팡갈로스에게 국가원수 자리(페탱이나 안토네스쿠 유형의 괴뢰 정부 수반), 사라피스에게 총리직이었다. 사라피스의 '애국적' 명분도 전해진다. 축국(Axis)이 승리할 경우 이탈리아가 동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그리스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성명 이후: 포로에서 ELAS 사령관으로

이 성명의 결말이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다. 사라피스가 죽음의 위협 속에서 ELAS에 합류하기로 동의하고, 반군주제·베니젤로스파 출신이라는 경력 덕분에 명목상의 지도권까지 쥐게 되자, 앞서 제기된 혐의들은 조용히 잊혀져 간다.

여기에는 코스토풀로스라는 인물이 큰 배경으로 놓여 있었다. 그 또한 반군주제·베니젤로스파 장교이자 1935년 베니젤로스파 쿠데타 운동의 핵심 인물로, 처음에는 ELAS에 가입했으나 노선 문제로 갈등을 빚고 탈퇴, 자신만의 조직인 '그리스 해방 투쟁군(ESAP)'을 창설한 인물이었다. 1943년 3월 1일, ELAS는 ESAP를 강제 해체하고 코스토풀로스와 사라피스를 체포했다. 코스토풀로스는 영국 SOE 장교 에디 마이어스(Eddie Myers)의 개입으로 3월 7일 석방된 뒤 중동 지역으로 떠났다.

이 일화는 저항 운동 내부의 정치적 경쟁과 선전이 얼마나 유동적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어제의 '인민의 적'이 오늘의 지도자가 되는 과정에서, 철저한 사실 확인보다는 당면한 정세와 진영의 필요가 더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