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685년, 모로시니의 반격 — 코로니 함락과 칼라마타 대승

1685년, 모로시니의 반격 — 코로니 함락과 칼라마타 대승

베네치아-오스만 전쟁의 시작

1684년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프란체스코 모로시니(Francesco Morosini)가 지휘하는 베네치아군은 개전 초기부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와 폴란드와도 동시에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펠로폰네소스반도의 그리스인들은 이미 혁명적 소요 상태에 있었다. 오스만 측은 이를 감지하고 관행대로 학살로 대응했으며, 그 희생자 중 한 명이 바로 코린토스 대주교 자카리아스였다.

마니의 반란과 이스마일 파샤의 침공

마니에서는 이내 거의 공개적인 반란이 일어나 베네치아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펠로폰네소스 세라스케르(최고 사령관) 이스마일 파샤는 병력 1만 명을 이끌고 마니를 침공해 방화와 학살을 자행했다. 그러나 마니인들은 맹렬히 반격하여 한 차례의 전투에서 약 1,800명의 투르크 병사를 섬멸했다.

1685년 2~3월 모로시니는 마니인들에게 무기와 탄약을 보냈지만 증원군은 보내지 않았다. 그러다 1685년 6월 21일, 베네치아 함대가 이오니아 제도에서 출항해 펠로폰네소스로 향했다. 함대에는 병력 8,000명(사타스(Sathas)의 기록에 따르면 9,500명)이 실려 있었다.

코로니 공성전

펠로폰네소스에 도착한 베네치아군은 협의 끝에 코로니(Koroni) 요새 공략을 결정했다. 코로니에는 강력한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오스만 주민들 역시 결사적으로 방어할 의지를 품고 있었다. 게다가 식량과 탄약도 충분히 비축되어 있었다.

이후 이틀에 걸쳐 공성군은 첫 참호를 팠고, 함대 선박에서 운반한 포 50문을 배치한 포대 3곳이 구축되었다.

투르크인들은 처음부터 광신적으로 저항했다. 심지어 성 밖으로 돌출해 모로시니의 달마티아 부대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참고로 베네치아 장군 휘하 병사들은 작센과 브라운슈바이크 등 독일 여러 지역 출신이 주를 이루었으며, 몰타의 성요한 기사단 기사들도 함께 참전했다.

구원군의 등장

한편 투르크 측은 할릴 파샤와 무스타파 파샤의 지휘 아래 구원군을 조직해 코로니의 포위를 풀려고 했다. 구원군은 공성군 진영 뒤편 인근 언덕에 진영을 치고 습격 작전으로 공성군을 계속 괴롭혔다.

이에 베네치아군은 진영 하단에 해자로 보강된 방벽을 축조해 투르크군을 감시하고 병사 100명을 경비로 배치했다. 같은 시기 성 안의 투르크군이 베네치아군 참호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했고, 800명 규모의 병력이 새로 축조한 보루를 공격했지만 이들 역시 실패했다.

두 파샤는 포위된 성에 증원을 보내기 위해 4,000명 분견대를 편성해 기독교군 진영을 관통하려 했으나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다.

위기와 모로시니의 즉각 반격

그럼에도 공성전은 기독교군에게 순탄하지 않았다. 성에 대한 모든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고, 성벽 아래 굴진 작전도 헛수고로 끝났다. 오히려 투르크군이 강대한 병력으로 역습해 나와 보루를 탈환하고 수비대 100명을 몰살시켰다.

그러나 모로시니는 즉각 반격에 나섰다. 용기병(dragoon)을 선봉으로 세우고 달마티아인들과 성요한 기사단이 후방을 지원하는 가운데, 기독교군은 투르크군 대부분을 휩쓸어 버리고 보루를 되찾았다. 이 전투에서 최소 300명의 투르크 병사가 전사했다.

모로시니는 전사한 투르크 병사 120명의 목을 베어 창에 꽂아 코로니 성벽 맞은편에 세워 두었는데, 이는 포위된 투르크인들에게 심리적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야간 기습 — 구원군 격파

한편 그리스인들은 유럽 정규군 대부대의 존재에 고무되어 다시 봉기하기 시작했다. 마니인들만 해도 무장 병사 1,500명으로 모로시니를 증원했다. 이에 양면전을 종식시키고 공성에 집중하고자 모로시니는 할릴·무스타파의 투르크 진영에 대한 기습 공격을 결심했다.

8월 25일 모로시니는 정예 3,000명을 배에 실어 투르크 진영 우측에 상륙시켰다. 이 부대는 골짜기를 따라 은밀히 접근했고, 동시에 모로시니의 주력 부대도 투르크군을 향해 진격했다.

포성 세 발이 신호였다. 기독교군이 일제히 잠든 투르크군을 덮쳐 와해시켰고, 겁에 질린 투르크군은 짐과 보급품, 대포, 군기 모두를 내버려 두고 도주했다.

코로니 함락

이후 기독교군은 코로니 총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8월 31일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공성군은 새로운 갱도를 파서 화약 통 250통을 설치했고, 이를 성공적으로 폭발시켜 성벽에 커다란 구멍을 냈다.

즉시 기독교 보병이 돌진했다. 그러나 투르크군은 코란을 든 무프티(종교 지도자)가 '예언자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라'라고 외치며 이끄는 가운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 첫 공격에서 기독교군은 약 400명이 전사하고 그만큼 부상을 입었다.

다만 투르크 측 역시 광신적인 무프티와 수많은 장교들을 잃었다. 이후 다시 돌입이 이루어지자 투르크 방어선은 완전히 붕괴했다. 병사들이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 최소 3,000명을 학살했고, 성에 있던 대포 120문도 손에 넣었다.

칼라마타 전투

코로니 함락 후 모로시니는 마니인들을 조르나타(Zarnata) 요새로 보냈고, 요새는 조약에 따라 항복했다. 조르나타에서 모로시니는 강건한 작센 병사 3,000명으로 증원된 뒤 칼라마타를 향해 진군했다.

칼라마타에는 보병 1만과 기병 2,000으로 구성된 투르크군이 집결해 있었고, 성을 등지고 진영을 치고 있었다. 한편 기독교군 — 정규병 8,000명과 마니 병사 1,500명 — 은 빈 전투(1683년)의 노장인 독일 장군 한니발 폰 데겐펠트(Hannibal von Degenfeld)의 지휘 아래 해당 지역에 상륙했다.

노련한 독일 장군은 지칠 줄 모르는 용기병을 선봉으로, 용맹한 마니인들과 달마티아인들을 앞세워 투르크 진지로 전진했다. 베네치아 연대는 중앙에, 우익에는 브라운슈바이크 출신 독일 부대가, 좌익에는 작센 부대가 배치되었다.

투르크군의 총지휘관은 다름 아닌 카푸단 파샤(함대 제독) 본인이었다. 기독교군은 투르크 진영 인근까지 진출했으나 낮은 능선 위에 전개를 멈추고, 함대의 선박들이 작센 부대를 지원하도록 배치했다.

투르크군은 기독교군 좌익에 기병이 없음을 확인하고 자신들의 기병으로 공격해 왔다. 그러나 작센인들은 집중 사격으로 스파히(Sipahi) 기병들을 쓰러뜨렸고, 함선의 대포들도 투르크 진영 곳곳에 죽음을 퍼부었다.

좌익에서 이런 전개가 벌어지는 동안 우익에서는 카푸단 파샤가 거의 전 보병을 브라운슈바이크 부대에 던져 넣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규율 있는 독일 부대는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연속 일제사격으로 투르크군을 분쇄했다. 양익에서 모두 패배한 투르크군은 기독교군의 반격을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승리의 여파

투르크군은 패배를 인정하고 칼라마타로 도주했다. 그러나 사기가 너무나 바닥나 있어 대포와 탄약을 스스로 파괴한 뒤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 이 승리에 힘입어 마니인들은 오이틸로(Oitylos), 켈레파스(Kelefas), 파사바스(Pasavas) 성들도 연달아 함락시켰다. 이것이 펠로폰네소스에서 거둔 첫 번째 의미 있는 대승들이었고, 앞으로 더 많은 승리가 뒤따를 것이었다.

1685년, 모로시니의 반격 — 코로니 함락과 칼라마타 대승

칼라마타 전투. 함대의 포격 지원을 받으며 전투 준비를 마친 기독교군의 모습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