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그리스는 왜 1974년 키프로스를 구하지 않았는가? 외무장관 아베로프의 해명

그리스는 왜 1974년 키프로스를 구하지 않았는가? 외무장관 아베로프의 해명

1974년 키프로스 침공이라는 국가적 비극 앞에서 그리스는 왜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당시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Konstantinos Karamanlis) 정부의 외무장관이었던 에반겔로스 아베로프(Evangelos Averof)가 의회 연설을 통해 남긴 해명은 지금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베로프가 밝힌 '개입 불가'의 이유

아베로프는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우리가 팬텀 전투기를 키프로스에 보내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보유한 팬텀은 총 18대였습니다. 카라만리스의 명령에 따라 이 기체들은 키프로스로 즉시 출격할 수 있도록 크레타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종사들이 아직 이 신형 무기에 대한 훈련을 마치지 못한 상태였고, 실제로 한 대는 착륙 중 사고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훈련 부족만이 문제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작전 반경이었습니다. 연료를 고려하면 이 전투기들은 키프로스 상공에 겨우 5~8분간 머물 수 있었습니다. 미래 방공에 매우 귀중할 기체들을, 터키군에게 격추당할 위험에 내몰라야 하는 미친 짓을 감행하겠습니까?"

그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터키는 키프로스 남해안에 레이더 3개와 다수의 비행장을 갖추고 있어 자국 전투기 50대를 출격시켜 그리스 전투기를 요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아베로프는 군사정권 시절의 참사도 함께 언급했다.

"군사정권은 전투기를 보냈지만 통신 착오로 국가방위군(National Guard)의 공격을 받아 한 대가 격추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과잉 애국주의는 사실을 왜곡합니다. 터키군이 자신들의 구축함 3척을 그리스 함선으로 오인해 전투기 3대로 한 척을 침몰시키고 또 한 척을 크게 손상시킨 사건은 이미 잊히고 말았습니까?"

마지막으로 그는 해군과 잠수함 운용에 대한 지적에도 답했다.

"우리의 제공권이 이토록 취약하고 터키의 공중 지원은 완전하고 지속적인 상황에서, 함대를 키프로스로 보내 다른 섬들의 방어마저 포기하자는 것입니까? 잠수함 이야기도 있던데 알려드립니다. 당시 터키는 키프로스 앞바다에 잠수함 3척을 배치해 소나 장비로 접근하는 모든 잠수함을 탐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섬들을 지켜야 할 신형 잠수함들을 '양 떼처럼' 도살장으로 보내길 원하셨습니까?"

이러한 해명이 설득력을 갖는지 여부는 결국 독자 각자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키프로스 파일'과 좌우 진영의 결론

1987년,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Andreas Papandreou) 정부는 이른바 '키프로스 파일(Cyprus file)'을 공개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오히려 지하 어둠 속에 더 단단히 봉인했다는 비판적 평가도 나온다. 참고로 의회 조사위원회는 무려 131명을 증인으로 소환했다.

조사 결과는 집권 여당 파소크(PASOK)와 야당 신민주주당(ND)이 각각 내놓은 두 가지 결론으로 나뉘었다. 놀랍게도 두 결론 모두 내전 때와 마찬가지로 책임을 외세—미국, 소련, 영국—와 군사정권 전반에 두루뭉술하게 돌렸을 뿐이다. 본나노(Bonanno), 아라파키(Arapaki), 그라지오(Grazio), 부제독 파파니콜라우 등 핵심 인물들에게는 아무런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들은 1974~75년 아무런 후폭풍 없이 예정대로 전역하고 은퇴했다.

결정적으로 두 결론서는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전 총리와 마카리오스 대주교까지 모두 '성화(聖化)'하는 데 그쳤다.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키프로스 비극의 진짜 원인은 여전히 안개 속에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