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이스라엘은 1967년 서안지구를 정복한 침략자였는가?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선제 공습을 감행하며 제3차 중동전쟁, 이른바 '6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단 6일 만에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서안지구), 골란고원을 점령하며 중동 지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렇다면 서안지구를 장악한 이스라엘은 과연 '침략자'였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전쟁 발발에 얽힌 복합적인 배경을 하나씩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역사적 배경

이스라엘과 아랍 이웃 국가들 간의 갈등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직후 벌어진 제1차 중동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와 영토 분쟁이 해소되지 않은 채 누적되었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은 대이스라엘 연합 전선을 형성해 나갔다. 특히 1956년 수에즈 위기 이후 시나이반도에는 유엔 긴급군(UNEF)이 배치되며 일시적인 안정이 유지되었지만, 1967년 5월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이 유엔군 철수를 요구하면서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었다.

2.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군대 증강과 티란 해협 봉쇄에 대응해 선제 공습을 개시했다. 이스라엘 지도부는 이러한 조치들을 자국 안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다. 특히 티란 해협 봉쇄는 이스라엘 남부 항구 에일라트로 이어지는 해상 생명선을 차단하는 것이었고, 이스라엘은 이를 전쟁 행위에 준하는 도발로 받아들였다.

3. 아랍 국가들의 군사적 움직임

전쟁 직전 이집트는 시나이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고, 요르단과 시리아도 군대를 동원해 이스라엘 국경 인근에 배치했다. 세 나라는 상호 방위 협정을 체결하며 공동 대응 태세를 갖추었고, 아랍 언론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삼면이 포위된 상황에서 임박한 공격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4. 외교적 실패

고조되던 긴장을 완화하려는 외교적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아랍군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 통과에 실패했고, 미국이 제시한 해협 재개 보장 방안도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소련은 아랍 측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흘리며 오히려 긴장을 부추기기도 했다.

5. 지역 내 경쟁 구도

이 전쟁은 아랍 민족주의·사회주의 운동과 이스라엘 간의 이념적 대립이라는 더 넓은 지역적 경쟁 구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나세르 대통령은 아랍 민족주의의 기수로서 아랍 세계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 노선은 그 정치적 정당성의 중요한 축이었다.

6. 국제 사회의 압력

국제 사회의 압력도 전쟁의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양측에 자제를 촉구하는 한편,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미국은 당시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공여를 제한하고 있었고, 이는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판단에 영향을 주었다는 분석도 있다.

침략자인가, 생존을 위한 선택인가?

6일 전쟁의 발발은 역사적 원한, 군사적 대치, 실패한 외교가 뒤섞인 복합적 결과였다. 이스라엘이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전쟁 이전 아랍 국가들이 취한 일련의 조치—대규모 병력 집결, 티란 해협 봉쇄, 유엔군 철수 요구—를 간과할 수는 없다. 많은 학자들은 이 전쟁을 어느 한쪽만의 책임으로 돌리기 어려운, 여러 요인이 얽힌 복잡한 사건으로 평가한다.

다만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문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1967년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여전히 중동 평화 논의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