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로마 제국 제10대 황제 티투스, 단 2년의 재위에도 '선정(善政)'으로 기억된 이유

로마 제국 제10대 황제 티투스, 단 2년의 재위에도  선정(善政) 으로 기억된 이유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로 시작된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이자, 로마 제국의 제10대 황제입니다. 재위 기간은 불과 2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극적인 사건들과 훌륭한 통치로 후세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인물입니다.

황실에서 교육받은 소년기

티투스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는 명문 귀족이 아닌 기사(에퀴테스) 계급 출신이었습니다. 임대 주택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지만,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비서 나르키소스와의 인연 덕분에 티투스는 황태자 브리타니쿠스와 함께 교육을 받으며 궁정에서 자랐습니다.

키가 작고 체격이 미약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몸과 성격 역시 이 시기 무렵에 다져진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가 지방 관직을 맡으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티투스는 훗날 아버지의 오른팔로서 활약하게 됩니다.

그의 재능은 본격적으로 66년에 시작된 유대 전쟁에서 꽃피웠습니다. 재무관(콰이스토르) 자리에 있던 티투스는 아버지를 따라 유대 반군을 진압하는 전역에 참여했고, 로마 진영에 투항한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 등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이 무렵 그는 유대의 왕녀 베레니케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의 강한 반대 여론에 부딪히자 그녀와 헤어지고 평생 독신으로 살기로 결심합니다. 클레오파트라 사건의 기억이 워낙 컸던 로마 시민들은 동방 출신 여인에게 극도로 경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 참고로 티투스 본인은 두 번 결혼했습니다. 첫 번째 아내는 먼저 사별했고, 두 번째 아내는 장인이 피소의 음모에 연루되면서 이혼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로마의 제9대 황제로 즉위하자, 티투스는 유대 전역의 최고 사령관이 되어 예루살렘 공방전을 지휘했습니다. 7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73년에는 마지노선인 마사다 요새마저 함락하며 유대 전쟁을 끝냈습니다. 요새에 남은 유대인들은 로마군에 항복하지 않고 집단 자결을 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세계사에서는 이 일련의 전쟁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라 부르며, 훗날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기에 일어난 반란을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이라고 합니다.

유대교는 야훼(YHWH) 한 분만을 섬기는 종교였기에, 30만 신을 섬긴다는 로마의 다신교 문화와 양립하기 어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뿌리내리고 살았지만, 이주와 분산의 성향이 강해 로마 제국 각지의 도시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제2차 전쟁 이후 예루살렘 입성이 금지되자 그들은 곳곳에서 새 터전을 찾았고, 20세기 시온주의 운동이 결실을 맺기까지 거의 2000년 가까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 구글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 디즈레일리 시대에 금융계를 주도한 로스차일드 가문이 모두 유대인이라는 점은 유명합니다.

로마의 '제0대 지도자'라 불리는 카이사르는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고, 이후 황제들도 이 노선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지배를 견디지 못하고 반복해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로마 전쟁을 마무리한 티투스는 개선식을 위해 로마로 돌아왔고, 친위대 사령관과 집정관을 겸하며 아버지와 함께 공동 통치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황제 티투스

로마 제국 제10대 황제 티투스, 단 2년의 재위에도  선정(善政) 으로 기억된 이유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69세로 생을 마감하자, 티투스는 단독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티투스의 재위 중 가장 큰 사건은 단연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입니다. 사화산으로 여겨졌던 베수비오 화산이 갑자기 불을 뿜으며 인근 도시 폼페이를 화산재와 용암 아래 묻어버린 것입니다.

티투스는 재건 사업에 아낌없이 사재를 쏟아부으며 복구에 매진했고, 로마 시민들은 그런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흥미롭게도 현재 발굴되는 로마 유적 상당수가 폼페이에서 나옵니다. 그 이유는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야훼 이외의 대상을 숭배하던 로마의 석상과 문화재가 대거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화산재에 덮인 폼페이만큼은 그 파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화산은 도시를 파괴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로마의 문화를 보존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역설이라 할 만합니다.

분화의 여파는 막대했습니다. 주변 지역의 피해가 극심했을 뿐 아니라, 로마 시내에서도 대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더욱이 제국 전역에서 대규모 역병이 돕았고, 티투스 역시 이 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티투스에 대한 평가

티투스의 재위는 고작 2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통치는 '선정(善政)'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통상 재임 중에 대재난이나 역병이 터지면 선정으로 평가받기 어렵습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일본 민주당 정부가 대표적인 예이지요. 그럼에도 티투스의 통치가 선정으로 불리는 것은, 그의 위기 대응이 신속하고 정확했다는 방증입니다.

사랑하는 유대의 여인 베레니케와의 이별까지 감수한 그가 결코 독단적인 군주가 아니었고, 로마를 위해 자신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는 점을 로마 시민들의 태도는 잘 보여줍니다.

훗날 대음악가 모차르트조차 티투스의 통치를 기리며 오페라 『티투스 황제의 자비(La clemenza di Tito)』를 작곡했습니다.

만약 그가 오래 살았다면 '오현제(五賢帝)'가 티투스를 포함한 '육현제'가 되었거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제외한 새로운 다섯 명의 목록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역사에는 '만약'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