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와 교황 알렉산더 2세
먼저 흔한 오해 하나를 바로잡고 시작하겠습니다.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당시 교황 알렉산더 2세(Pope Alexander II)는 분명히 재위 중이었습니다. 그는 1061년부터 1073년까지 교황직을 수행했으며, 실제로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즉 훗날의 '정복자 윌리엄'의 잉글랜드 침공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축복한 인물입니다.
당시 교황의 지지는 단순한 외교적 호의가 아니라 침공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알렉산더 2세는 왜 윌리엄의 편에 섰을까요?
윌리엄에게 하사된 성스러운 깃발
알렉산더 2세는 윌리엄에게 교황의 축성을 받은 깃발을 하사했습니다. 이 깃발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윌리엄 군대가 게양한 것으로 전해지며, 이 원정이 교황의 승인을 받은 '정당한' 사업임을 상징했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참전 병사들에게 죄의 사면이 약속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십자군 운동에서 나타나는 구조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교황이 윌리엄을 지지한 세 가지 이유
1. 해럴드의 위증 혐의
1064년경, 해럴드 고드윈슨(Harold Godwinson)은 노르망디를 방문했을 때 성유물 위에서 윌리엄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지지하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노르만 측의 주장에 따르면 해럴드는 1066년 에드워드 참회왕이 사망하자 스스로 왕위에 오르며 이 맹세를 저버렸고, 이는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용서하기 어려운 위증이자 중죄로 여겨졌습니다. 교황의 입장에서 맹세 파기자를 응징하는 것은 충분히 정당한 명분이었습니다.
2. 잉글랜드 교회의 부패와 반(反)로마적 태도
더욱 결정적인 이유는 잉글랜드 교회의 상태였습니다.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간드(Stigand)는 윈체스터 주교직을 겸직하는 등 교회법을 어겼으며,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정을 받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교황청은 여러 차례 그를 징계했지만 잉글랜드는 이를 무시했고, 결국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에 대한 불복종 상태, 즉 준(準)분열 상태로 간주되었습니다. 윌리엄의 정벌은 이런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여 로마의 통제 아래 되돌릴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습니다.
3. 교회 개혁파와 노르만 세력의 연대
알렉산더 2세는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되는 힐데브란트(Hildebrand)가 이끄는 급진적 교회 개혁파와 긴밀히 협력하던 교황이었습니다. 개혁파는 성직 매매의 근절과 교황 권위의 확립을 추구했는데, 젊고 유능한 노르만 귀족들은 이 개혁의 든든한 동맹군이었습니다. 실제로 같은 시기 알렉산더 2세는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서 이슬람 세력과 싸우던 노르만 지도자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에게도 깃발을 하사하며 지지를 보냈습니다. 즉, 윌리엄에 대한 지지는 노르만 세력과의 폭넓은 전략적 연대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전투 이후의 결과
헤이스팅스에서 윌리엄이 승리한 뒤, 예상대로 잉글랜드 교회는 대대적인 개혁을 겪게 됩니다. 스티간드는 1070년 교황 특사들에 의해 파면되었고, 이탈리아 출신의 학자 랑프랑(Lanfranc)이 새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윌리엄은 또한 매년 베드로의 헌금(Peter's Pence)을 성실히 납부하며 로마와의 우호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요컨대 교황 알렉산더 2세의 지지는 종교적 명분(위증 응징과 교회 개혁)과 현실적 이해(노르만 세력과의 연대,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영향력 확대)가 결합된 결과였으며, 이 덕분에 노르만 정복은 단순한 침략 전쟁이 아니라 '축복받은' 정당한 사업으로 포장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