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비스마르크는 언제 그리고 왜 독일 총리직에서 물러났습니까?

비스마르크는 1890년 3월 18일 독일 총리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그가 해임된 데에는 사회 정책, 외교 정책, 가톨릭 교회 처우에 대한 새 황제 빌헬름 2세와의 의견 차이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 사회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

당시 독일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고 있었고 이로 인해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고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습니다. 노동계급의 만족을 유지하고 국가에 충성하기 위한 사회복지정책을 강력하게 옹호했던 비스마르크는 노령연금, 상해보험, 건강보험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사회보험 프로그램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사회 문제에 대해 좀 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던 빌헬름 2세는 이러한 제안이 사회주의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반대했습니다.

II. 외교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

비스마르크는 외교의 달인이었고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복잡한 국제 관계를 성공적으로 헤쳐나갔습니다. 그는 동맹 체제를 통해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다른 유럽 강대국과의 직접적인 갈등을 피했습니다. 반면에 빌헬름 2세는 외교 문제에 있어서 더욱 야심 차고 독단적이었습니다. 그는 독일의 세력과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고, 공격적인 움직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점으로 인해 외교적 위기를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 사이의 불일치가 발생했습니다.

III. 가톨릭 교회에 대한 대우:

비스마르크는 독일 교회의 영향력을 두고 가톨릭 교회(Kulturkampf)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는 가톨릭 성직자의 권력을 제한하는 정책을 도입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분노했고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가 긴장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에 좀 더 관대했던 빌헬름 2세는 이러한 긴장을 완화하고 바티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차이가 극에 달해 결국 빌헬름 2세는 1890년 3월 18일 비스마르크를 독일 총리에서 해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사임한 후 자신의 영지로 물러나 1898년 사망할 때까지 정부 정책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비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