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937년 대함부르크법: 히틀러의 서명 한 번으로 탄생한 엘베 강의 거대 도시

글: 디르크 헴펠(Dirk Hempel), NDR.de

1937년 4월 1일, '대함부르크법(Groß-Hamburg-Gesetz)'이 발효되었습니다. 나치당(NSDAP)은 함부르크 시청 앞에서 수천 개의 횃불을 밝히며 성대한 축하 행사를 열었습니다.

그날 저녁, "총통" 히틀러의 부관 루돌프 헤스(Rudolf Hess)는 대형 하켄크로츠 깃발이 걸린 시청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3만 명의 군중은 횃불을 든 채 당시 '아돌프히틀러광장'으로 불리던 광장을 행진했습니다. 이어 헤스는 선언합니다. "오랫동안 하나가 되어야 마땅했던 것이 이제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대함부르크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히틀러가 원했던 것: 엘베 강변의 강력한 대도시

히틀러의 사인 단 한 번으로 프로이센령 도시 알토나, 반즈베크, 하르부르크빌헬름스부르크가 한자도시 함부르크에 통합되었습니다. 함부르크의 면적은 거의 두 배로 늘어났고, 인구는 50만 명에서 170만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이웃 도시들에 파묻혀 있던 함부르크는 수십 년간 영역 확장을 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1920년 베를린이나 루르 지역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은 행정 구역 개편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프로이센 측 도시들이 막대한 재정을 들여 통합에 저항하고, 오히려 자체적인 독립 강화를 추진해 왔기 때문입니다.

오랜 협력의 역사

세인트파울리(St. Pauli) 포장도로에 박힌 돌들은 알토나와 함부르크 사이의 옛 국경을 오늘날까지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네 도시는 항구 산업과 지역 교통 등에서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었습니다. 트램은 오래전부터 함부르크의 베를리너토어(Berliner Tor)에서 알토나의 오텐센(Ottensen) 지구까지 운행했습니다. 주민들 역시 가까운 거리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반즈베크 상인들은 함부르크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를 했고, 엘베 강변 알토나 공원은 한자도시 주민들과 화가·시인·음악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으며, 배우들은 함부르크의 유명 예술 축제에서 함께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나치는 전쟁을 향한 무장 계획을 본격화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게, 상업 도시 함부르크와 주변 프로이센 산업 도시가 결합된 엘베 강변의 강력한 경제 대도시가 필요했습니다.

전쟁 준비

몇 년 전만 해도 히틀러는 "알토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라며 엘베 강변 대규모 개발을 함부르크 시계 안으로 제한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제 전쟁 준비 4개년 계획의 총책임자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이 통합을 완성하면서, 함부르크는 '독일 해운의 수도'이자 제국 제2의 도시로 거듭납니다.

아임스뷔텔러샤우세(Eimsbütteler Chaussee)에서는 옛 국경선이 보행자 도로를 정확히 가로질렀습니다. 오늘날에는 표식이 그 위치를 알려줍니다.

이후 독일 수산업의 3분의 1, 조선업의 4분의 1, 광유 산업의 5분의 1이 대함부르크에 집중됩니다. 곧 수만 명의 노동자가 재무장을 위한 군함, 전차 부품, 곡사포, 폭탄, 권총, 탄약 생산에 동원됩니다. 독일 해군 최초의 중순양함 '어드미럴 히퍼(Admiral Hipper)'호는 그해 겨울 블롐운트포스(Blohm + Voss) 조선소에서 진수되었습니다.

독일 북부 전역을 뒤흔든 재편

행정 구역 재편은 함부르크 경제권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프로이센의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독일 북부 대부분 지역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뤼베크는 700년이 넘는 국가 독립을 잃고 주(州) 지위가 해체된 채 프로이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에 편입되었습니다. 함부르크의 게스타흐트(Geesthacht)와 올덴부르크의 유틴(Eutin)도 프로이센으로 넘어갑니다.

오늘날 니더작센 지역에 해당하는 곳에서는 당시 프로이센 빌헬름스하펜 지역이 인접한 뤼스트링겐 지역과 통합되어 올덴부르크 주에 편입되었습니다. 1394년부터 함부르크에 속해 온 쿡스하펜 시와 노이베르크 섬, 샤르호른 섬, 그리고 엘베 강 어귀의 리체뷔텔(Ritzebüttel) 지역은 프로이센으로 이관되었습니다. 메클렌부르크와 프로이센 사이에도 작은 영토가 교환되었습니다. 또한 피네베르크, 슈토르마른, 슈타데, 하르부르크, 라우엔부르크 등 함부르크 주변 27개 지방자치단체가 새로 연합하게 됩니다.

함부르크 지역의 비판적 목소리

특히 함부르크 지역에서는 도시 계획 전문성이 고려되지 않은 채, 관할 대관구(Gau) 의원들의 짧은 협상 끝에 다소 우연스럽게 경계가 그어졌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함부르크 시민들이 환호하는 동안에도 통합 지역, 특히 하르부르크와 슈토르마른 일대에서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컸습니다.

오파겐(Ophagen) 거리에 교차해서 놓인 포장돌은 한때 알토나가 끝나고 함부르크가 시작되던 지점을 보여줍니다.

엘베 강변 대도시권의 역사적 발전을 연구해 온 사회문화사학자 노르베르트 피셔(Norbert Fischer) 박사는 함부르크 중심의 일방적 목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른 영향권 주변 지역과 마찬가지로 함부르크도 법안 준비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함부르크는 주민의 절반과 빌슈테트(Billstedt), 브람펠트(Bramfeld), 로브뤼게(Lohbrügge) 같은 상공업 발달 지역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대함부르크는 오늘날까지

그럼에도 1945년 이후에도 나치 시절의 법은 개정되지 않았습니다. 뤼베크는 1956년 연방헌법재판소에서 자치권 회복에 실패했습니다. 함부르크에서는 영국 점령군이 강력한 경제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도시 통합을 다시 해체하려 했지만, 훗날 전(前) 알토나 시장 막스 브라우어(Max Brauer)가 의장을 맡게 될 상원이 이 계획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간소화된 행정, 집중된 무역세 수입, 균일한 경제 정책 같은 통합의 이점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재건에 더욱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그 효용은 오늘날까지 입증되고 있습니다.

한편 여러 지역 주민들은 수십 년째 특유의 의식을 지켜 왔습니다. 분리주의 움직임이 종종 나타나는 하르부르크와 알토나뿐 아니라, 옛 올덴부르크령 유틴의 노인들조차 여전히 "융페른스티크(Jungfernstieg)에 갈 때면 함부르크에 간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