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서고트족은 어떻게 로마를 함락시켰는가? — 410년 로마 약탈의 전말

로마 공성전

서기 410년 8월 24일, 알라리크(Alaric)가 이끄는 서고트족(Visigoths)이 서로마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를 포위했습니다. 당시 서고트족은 이미 이탈리아 반도의 상당 지역을 장악한 상태였으며, 이번 공성전은 길고 파괴적인 원정의 정점을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로마 성벽 안에는 약 15만 명의 로마 시민과, 주변 지역에서 피난 온 거의 비슷한 숫자의 난민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도시의 방어 체계는 크게 노후화되어 있었고 병력 또한 심각하게 부족했습니다. 유일하게 현실적인 대책은 라벤나(Ravenna)에 머물던 황제 호노리우스(Honorius)가 구원군을 보내줄 때까지 버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호노리우스는 충분히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지 못했고, 대신 알라리크와 협상하겠다는 사절단을 보내는 데 그쳤습니다.

실패한 협상과 천문학적인 몸값

협상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알라리크는 금 5,000파운드, 은 30,000파운드, 비단 튜닉 4,000벌, 진홍색으로 염색한 가죽 3,000장, 그리고 후추 3,000파운드라는 엄청난 몸값을 요구했습니다. 로마 원로원은 특히 후추 3,000파운드라는 요구에 처음에는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하지만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원로원은 결국 고트족 왕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로마인들은 이교 신상과 유물들을 녹여 금속 덩어리로 만들었고, 도시 내 교회와 신전의 재보를 징발했습니다. 다소의 지연 끝에 몸값은 서고트족에게 지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몸값을 받고도 서고트족은 포위를 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시를 약탈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410년 8월 24일, 로마 약탈

서고트족은 410년 8월 24일 로마 약탈을 개시했으며, 이 날짜는 오늘날까지 역사적 기억 속에 악명 높은 날로 남아 있습니다. 알라리크는 기독교 성지를 침범하지 말라는 명확한 명령을 내렸지만, 병사들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광범위한 약탈과 파괴가 벌어졌고, 기독교 교회들은 더럽혀졌으며 수많은 예술품이 훼손되거나 강탈당했습니다.

서로마 제국 역사의 전환점

로마 약탈은 서로마 제국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로마의 위신과 자신감에 치명타를 입혔고, 제국의 쇠퇴를 한층 가속화했습니다. 흥미롭게도 로마라는 도시 자체는 이후 문화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회복했으며, 약 6세기 뒤인 800년 카롤루스 대제의 즉위와 함께 '재건된 로마 제국'의 상징적 수도로 다시 부상하게 됩니다.

알아두면 좋은 추가 정보

  • 알라리크 군대의 규모는 약 4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 동시대 연대기 작가 조시무스(Zosimus)에 따르면 약탈은 3일간 지속되었으나, 일주일 가까이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 도시에 입힌 피해에도 불구하고, 서고트족의 약탈은 흔히 묘사되는 것만큼 철저하거나 파괴적이지 않았습니다.
  • 도시의 대부분 건물과 구조물들은 온전히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