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는 '대전쟁(Great War)'으로 불리게 된 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참조: Desperta Ferro Contemporánea #1: 1914. 대전쟁의 발발). 정확히 5년 후 같은 날, 독일 총리 헤르만 뮐러가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으로 독일에는 가혹한 경제·사회적 조건이 부과되었다. 조약의 명분은 평화 보장과 새로운 세계 질서 수립이었으나, 패전국에 강요된 강력한 제재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가는 길
1918년 11월 9일, 빌헬름 2세 황제가 퇴위했고 이틀 뒤인 11월 11일 독일은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약 200만 명의 전사자와 500만 명의 부상자·장애자를 낳은 전쟁에 지친 독일 민중의 사회적·군사적·정치적 혼란이 항복을 재촉했다. 휴전 조건에 따라 독일군은 철수해야 했고, 연합군은 라인란트 지역을 점령하며 위협적 태세를 갖췄다. 연합국의 안전을 위해 영국은 전시가 아닌 시기에도 독일 해상 봉쇄를 유지하며, 굶주린 독일 국민에게 식량과 물자 반입을 차단했다. 승전국들은 파리에 모여 패전국들과 체결할 조약들을 협상했다.
역사가들은 이 과정을 '파리 강화(Paris Peace)'라 부르며, 이를 '강요된 평화(imposed peace)'로 정의한다. 패전국 대표단이 협상 테이블에 전혀 앉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단 두 차례만 소환되었는데, 한 번은 조약 초안을 전달받기 위해, 또 한 번은 침공 위협 속에서 자국 대표 없이 서명하기 위해서였다. 독일 측이 초안에 대한 수정 제안서를 제출했으나 무시당했다. 서명식에서 독일 대표단이 겪은 모욕도 컸다. 군사 호위 아래 다른 대표단과 떨어진 별도의 테이블에 앉아야 했으며, 마치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독일 군인의 참석은 '비민주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고, 이는 독일 군부와 보수층이 자국 정치인들을 '매국노'로 매도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히틀러가 훗날 선전 수단으로 삼은 딕타트(Diktat, 강요된 조약) 이미지를 형성했다.
프랑스는 파리를 강화 회의 장소로 고집했다. 파리는 전선 후방에 머물렀던 도시라 대독 감정이 여전히 격렬했고, 파리 시민들이 겪은 극심한 물자 부족과 고통 속에서 수천 개의 호텔 객실과 사무실, 인쇄소, 차량을 확보해야 하는 대규모 회의를 치르기엔 부적절한 환경이었다. 이 장소 선택은 이후 협상의 불안정한 향방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협상 대표들의 상충하는 이해관계
파리에는 총 27개국이 모였으며, 러시아만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이미 별도 강화를 맺었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실질적 주도권은 '5개국 이사회'(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이탈리아)가 쥐었으나, 실제로는 영·프·미 3국이 주도했다. 일본은 곧 배제되었고,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올란도 총리는 영토 요구가 무시당하자 신경쇠약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회의장을 떠나기도 했다.
프랑스(조르주 클레망소): 안보와 보복
전장에서 100만 명 이상을 잃고 자국 영토가 최대 전장이 된 프랑스의 요구는 명확했다. 막대한 배상금, 영토 귀속 변경, 독일의 영구적 약화를 통한 안보 확보였다. 라인란트 비무장화로 재침공 시도를 차단하려 했으며, 1871년 보불전쟁(참조: Awake Ferro Modern History #13: 나폴레옹 3세의 황혼 및 #28: 비스마르크 대 제3공화국) 때 잃은 알자스-로렌을 되찾았고, 탄광 지대인 자르 분지의 귀속을 요구했다. 연합국은 자르란트를 국제연맹 관할로 두고 15년간 그 수익을 프랑스에 넘기는 타협안을 택했다. 배상금 액수는 프랑스 요구에 미치지 못했고, 라인란트 공화국 수립 제안도 거부되었는데, 이는 주로 영국의 반대로 인한 것이었다. 영국은 독일이 전쟁 비용을 치르길 원했으나, 독일이 과도하게 약화되어 프랑스가 대륙의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대신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킬 경우 영국과 동맹을 맺는 방안을 제시했다.
영국(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해군 우위와 경제적 실리
영국 대표 로이드 조지는 전쟁 중 영국 제해권을 위협했던 독일 함대 전력 약화에 주력했다(참조: Desperta Ferro Contemporánea #32: 유틀란트 해전). 독일 제정 해군 일부를 프랑스에 넘기려 했으나, 독일 장교들은 함선을 넘기느니 자침(自沈)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제해권은 유지되었다. 또한 독일 경제에 지나친 타격을 주지 않으려 했는데, 독일은 중요한 교역 상대였고 독일 경제 위기는 영국 시장에도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우드로 윌슨): 이상주의와 고립주의의 모순
미국은 패전국과 화해하는 조약을 지지하며, 1918년 1월 8일 발표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14개조 평화 원칙'을 기초로 삼았다. 식민지 자결권, 무관세 무역, 항해 자유, 그리고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창설을 통한 재발 방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협상 말미에 미 상원이 자국의 제안인 국제연맹 가입을 거부하며 고립주의를 택했다. 많은 비평가들은 미국이 식민 제국 질서를 무너뜨리고 무역과 자본주의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자국 이익에 맞게 재편하려 했다고 비판한다.
독일에 부과된 조치들
벨기에, 덴마크, 이탈리아 등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영토의 일부를 할양받았다. 폴란드는 옛 동맹국(독일·오스트리아) 영토를 강제로 떼어내 정치적 자립을 이루었는데, 독일로부터 상실레지엔(상부 실레지아) 등 주요 지역을 얻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치히 자유시(Danzig Corridor)의 설치로, 폴란드에 바다로 나가는 출구를 마련해주기 위함이었다. 이 영토 변경으로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이 단절되었고, 이는 독일인의 폴란드에 대한 복수심(레반시즘)을 자극했다. 독일의 대다수 식민지는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일부는 당시 영국의 보호령이던 뉴질랜드나 일본에 넘어갔다. 이로써 독일은 국토의 1/7, 식민 제국 전체, 인구의 1/10을 상실했다.
군사적으로는 독일군 10만 명(병사 9만 6천, 장교 4천)으로 감축되었고, 항공기·전차·중포 생산이 금지되었으며, 288문의 포만 보유할 수 있었다. 모든 군수 생산은 연합국 감시 하에 놓였다. 라인강 좌안은 연합군이 점령했는데, 초기엔 평화 유지가 명분이었으나 나중엔 독일 정부가 배상금을 납부하도록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다(독일은 1921년까지 정기적 납부를 이행하지 않았다). 전쟁 배상금 총액은 1,200억 금 마르크로 책정되었고, 1921년까지 200억 금 마르크를 선납해야 했다. 이를 감시하기 위해 '배상위원회'가 설치되어 독일 경제를 감독했다. 독일 국민은 이 천문학적 액수에 반발했고 정부도 납부를 거부했으며, 연합국은 독일 영토를 추가 점령하며 압박했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 중 가장 큰 논란을 낳은 조항은 제231조(전쟁 책임 조항)이었다. 이 조항은 전쟁을 독일의 주된 책임으로 돌리고 타국의 책임을 부차적으로 격하시켰다. 독일은 이 조항을 인정하려 했으나 연합국은 타협하지 않고 독일에게 '전범'의 낙인을 찍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파장
베르사유 조약을 나치즘 부상의 유일한 원인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가혹한 조건은 대다수 독일인에게 반유럽·복수주의 정서를 심어주었고, 전간기(戰間期)의 불안정한 사회·경제적 상황과 맞물려 나치당 같은 극단주의 운동이 싹틀 수 있는 온상을 제공했다. 역사는 '정의로운 평화'가 승전국의 오만과 패전국의 굴욕 위에 세워질 때, 그 평화가 얼마나 취약한지 뼈아프게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