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관중 5만 명이 몰린 목조 극장의 붕괴, 고대 로마 최악의 참사 '피데나에 원형극장 사고'

대규모 인파가 모이는 공개 행사장에서 사고는 곧 대참사로 직결된다. 나이트클럽, 콘서트장, 축구 경기장 등이 안타깝게도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장소로 꼽히는 이유다. 이는 비단 현대의 일만은 아니다. 역사상 기록된 가장 끔찍한 관중 참사는 약 2,000년 전, 로마 시 인근 도시 피데나에(Fidenae)의 원형극장에서 일어났다.

로마의 관문, 전략적 요충지 피데나에

라티움 지방에 위치한 피데나에(라틴어: Fidenae)는 테베레 강 하류와 아펜니노 산맥 사이, 에트루리아와 캄파니아의 경계에 자리한 도시다. 로마에서 북쪽으로 불과 8km 떨어진 이 도시는 티레니아 해와 아드리아 해를 잇는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의 길목에 있어 예로부터 소금 운송로의 핵심 거점이었다.

로마 건국 초기부터 피데나에는 에트루리아 세력의 전진 기지이자 로마의 골칫거리였다. 인근 부유한 에트루리아 도시 웨이가 피데나에를 장악하고 로마와 수차례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기원전 396년 독재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가 웨이를 정복하고 피데나에를 함락시킨 뒤, 이 도시는 한동안 폐허가 되었다가 로마풍으로 재건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값싼 나무로 지어진, 탐욕이 낳은 무대

재건된 피데나에에는 검투사 경기(무네라)와 맹수 사냥(베나티오) 등을 위한 원형극장이 들어섰다. 그런데 이 극장은 석조가 아닌 목조였다. 건축주인 해방 노예 아틸리우스(Atilius)는 자금력이 부족하자 기초 공사를 부실하게 하고 보와 기둥을 제대로 연결하지 않은 채 나무로만 건물을 올렸다. 타키투스는 그를 두고 "돈이 많아서도, 시민의 환심을 사려 함도 아닌, 오로지 천박한 이윤만을 좇아" 지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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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데나에 원형극장 복원 상상도

금지령 해제 후 몰린 인파, 순식간에 무너진 관중석

서기 27년, 티베리우스 황제가 한동안 금지했던 검투 경기를 다시 허용하자 억눌렸던 관람 욕구가 폭발했다. 남녀노소 약 5만 명의 구름 관중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관중의 무게와 환호, 움직임에 취약한 목조 구조물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사망자 수치는 사료마다 차이를 보이지만, 수에토니우스는 2만 명, 타키투스는 5만 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부상자까지 합치면 피해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타키투스는 현장을 이렇게 전한다. "폐허를 치운 뒤 저마다 자기 시신을 찾아 껴안고 입 맞추는데, 얼굴이 뭉개지거나 나이가 비슷해 서로 자기 가족이라 우기는 통에 큰 혼란과 다툼이 벌어졌다."

관중 5만 명이 몰린 목조 극장의 붕괴, 고대 로마 최악의 참사  피데나에 원형극장 사고
고대 로마 원형극장의 일반적인 구조

참사 이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다

카프리 별장에 머물던 티베리우스는 백성의 간청에 급거 로마로 돌아와 수습을 지휘했다. 원로원은 재발 방지를 위해 강력한 규제를 신설했다.

  • 자격 제한: 공연 주최자에게 기사 계급 자격 요건인 4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요구했다.
  • 시설 기준: 원형극장은 반드시 견고한 석조로 짓고, 별도 임명된 감찰관의 승인을 받도록 의무화했다.

건축주 아틸리우스는 추방형에 처해졌으나, 타키투스는 이것이 물리적 추방인지 향후 사업권 박탈인지 명확히 하지 않았다. 피데나에의 비극은 '안전 불감증'과 '이윤 추구'가 빚어낸 인재(人災)가 어떻게 역사에 남는지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뼈아픈 교훈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