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으로 열린 태평양 전쟁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에 위치한 미국 해군 기지에 대한 기습 공격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과 일본 간의 전쟁을 촉발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 공격은 하와이에 주둔하던 미 해군 함대를 괴멸시키려는 시도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 입장에서 미 함대의 완전한 파괴는 태평양 제도를 향한 정복과 영토 확장 계획을 지속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배경: 팽창 정책의 뿌리
진주만 공격은 1930년대 중국 침략으로 시작된 일본의 영토 팽창 프로젝트의 연장선에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메이지 유신 이후 교육 체제 개편을 통해 국가 전반에 퍼진 민족주의, 군국주의, 그리고 사상 주입(세뇌 교육)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교육은 "일본은 다른 나라보다 우수한 민족이며, 전쟁을 통해 타국의 영토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권리가 있다"고 가르쳤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신속하게 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팽창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버마(미얀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차례로 공략하며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격파했다. 이 지역의 전투 기록에는 일본군이 자행한 수많은 잔혹 행위와 전쟁 범죄가 생생히 남아 있다.
미국과 일본의 오랜 대립 구도
미일 간의 갈등은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은 중국 내 일본의 영토 요구를 연달아 거부했다. 또한 일본이 노리던 지역인 필리핀에 미국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일본인들에게 큰 불쾌감으로 작용했다.
오랜 세뇌 교육 끝에 상당수 국민이 전쟁을 열망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는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대한 무지를 극명히 드러내는 결과였다. 즉, 일본은 적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했으며, 1937년부터 이어진 중일전쟁으로 경제와 자원이 크게 소진된 상황에서 미국과의 장기전을 감당할 역량이 없었다.
야마모토의 작전 설계와 나구모의 지휘
진주만 공격을 기획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1930년대 일본의 광적인 군국주의 흐름에 맞섰던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1941년 12월 7일 공격의 목표는 태평양에 배치된 미 해군 함대의 완전한 소멸이었고, 이를 통해 일본은 저항 없이 팽창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하려 했다.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지휘한 진주만 기습은 미국을 기습하는 데 성공해 막대한 물질적 피해와 사망자를 냈지만, 작전 자체는 빈약하게 실행되었다. 공격으로 미국의 주요 함선 일부가 침몰했으나 하와이의 함대를 완전히 파괴하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더욱이 미국의 조선 산업은 놀라운 속도로 새로운 함선을 건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실은 곧바로 만회되었다. 결국 진주만 공격은 그때까지 전쟁에 부정적이던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전쟁터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현실은 나구모의 공격이 미국인들을 충격시키고, 다치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데는 충분했지만, 그들의 전쟁 수행 능력을 훼손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는 매우 잘못 설계된 작전이었다."|1|
공격의 결과와 태평양 전쟁의 전개
공격으로 인한 미국 측 피해는 2천 명이 넘는 사망자, 약 5척의 침몰 선박, 그리고 심각하게 파손된 다수의 함선에 달했다. 일본 내에서는 진주만 공격이 일본 해군의 위대한 승리로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의 전략은 미국에게 빠른 패배를 안겨 협상과 항복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진주만 공격 후 불과 몇 달 만에 미국은 1942년부터 1943년 사이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며 일본과의 전쟁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양국 간의 전쟁은 1945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뒤 일본이 항복하면서 비로소 막을 내렸다.
|1| HASTINGS, Max. The world at war 1939-1945. Rio de Janeiro: Intrinsic, 2012, p.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