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험의 의상에 영감을 준 호화로운 러시아 가장무도회에 관한 기사에서, 표트르 1세 대제의 아버지인 알렉세이 1세 차르의 첫 번째 아내이자 표도르 3세 차르의 어머니인 마리아 밀로슬라브스카야가 궁정에 소집된 200명의 귀족 후보자 중 미모로 왕비로 선발되었다는 사실을 다뤘습니다. 이 독특한 풍습인 '신부 쇼(Смотр невест)'는 사실 비잔틴에서 유래했으며, 797년부터 802년까지 비잔틴을 통치한 아테네의 이레네 황후가 처음으로 이 관문을 통과한 여왕이었습니다.
비잔틴의 전통, 러시아로 전해지다
최후의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딸 소피아 팔라이올로고스가 15세기 이반 3세와 결혼하면서 이 독특한 전통을 러시아 땅에 전했습니다. 그녀는 모스크바 궁정에 모국 특유의 화려함을 불어넣어 이를 소위 '제3의 로마'(제2의 로마는 콘스탄티노플)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보다 500여 년 앞서 살았던 이레네는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자신의 처지를 이용하려는 자들 틈바구니에서도 소피아보다 더 큰 권력을 누렸습니다.
고귀한 혈통, 그러나 고아였던 소녀
이레네는 중앙 그리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명문 사라타페코스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면서 경제적 기반은 약했습니다. 그녀에게는 한 가지 무기가 있었는데, 바로 비범한 미모였습니다. 이로 인해 콘스탄티누스 5세 황제의 명으로 궁정에 불려가 그의 아들 레온(레오 4세)과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차이, 혼인의 걸림돌이 되다
하지만 미모로도 감출 수 없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재정적 격차뿐만 아니라 신앙 문제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열렬한 성상파괴론자였습니다(그의 아버지 레오 3세는 그리스도와 성인의 상상을 이단으로 여겨 금지했습니다). 반면 이레네는 정반대 입장인 성상옹호론자였습니다. 신앙이 제정 권력과 직결되던 시절, 이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신부 쇼'의 첫 주인공이었나?
이러한 이유로 이레네가 전국에서 미모로 유명한 젊은 여성들이 미래의 남편 앞에서 행진하는 '신부 쇼' 후보자 중 한 명이었다는 추측이 제기됩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 증거는 없으며, 일부 학자는 이 관행이 9세기 역사가들의 창작일 가능성도 제기합니다. 다만 이 제도는 비잔틴만의 전유물은 아니어서, 중국 송나라 때도 행해졌으며, 앞서 보았듯 러시아로 전해져 1684년 이반 5세와 프라스코비아 살티코바의 결혼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만약 이 쇼가 실제로 있었다면 이레네가 그 시초가 된 셈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영예는 788년 이레네가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를 위해 13명의 후보 중 골라준 며느리 마리아 암니아에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신부 쇼로 뽑혔다고 결혼 생활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6세 본인이 그 증거입니다. 그는 어머니가 골라준 아내 마리아를 버리고, 두 딸을 낳았음에도 수도원으로 보낸 뒤 정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혼하여 어머니의 시녀(쿠비쿨라리아)였던 테오도테와 재혼했습니다.
섭정에서 단독 통치자로
이레네와 레온 사이에서 771년 태어난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가 775년 황제가 된 지 4년 만인 780년, 부친이 결핵으로 사망하자 9세의 나이로 레오 4세 '하자르'로서 즉위했습니다. 별명 '하자르'는 그의 어머니가 하자르 공주 치치크(역시 이레네로 개명)였기 때문입니다. 하자르인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족으로, 콘스탄티누스 5세와 동맹을 맺고자 딸을 시집보냈습니다. 레오 4세는 단독 통치로는 5년밖에 못 했지만, 부친이 아들과 손자를 공동 황제로 삼아 계승을 보장하려 했던 터라(삼촌 니케포로스와 콘스탄티누스의 야심을 막으려 했음에도 음모가 발각되어 유배 보냄) 기반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성상 논쟁 속의 섭정
레오 4세의 통치는 부친과 달리 성상옹호론자에 대한 박해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아내 이레네에 대한 배려로, 키프로스의 파울로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관용과 국교의 성격 변경은 별개여서, 공식적으로는 성상파괴론이 유지되었고 결국 반대파에 대한 박해가 재개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이레네의 방에서 성상이 발견되면서 벌어졌습니다. 레오는 이를 빌미로 부부 관계를 거부했습니다. 이 일화는 수십 년 뒤 테오필로스 황제의 아내 테오도라 황후가 성상파괴론을 종식시킨 이야기와 너무 닮아 진위 여부가 의심되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건 레오의 죽음으로 이레네는 9세 아들의 섭정이 되었습니다.
음모와 외교, 그리고 전쟁
한 달도 안 되어 시동생 니케포로스가 주도한 첫 궁정 음모에 직면했습니다. 이레네는 이를 진압하고 모든 고위 관료를 자기 사람으로 교체하며 추가 시도를 차단했습니다. 시누이 안투사를 공동 섭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거절당해 홀로 권좌에 남았습니다. 선례는 헤라클리우스의 둘째 아내 마르티나뿐이었는데, 그녀는 1년 만에 혀가 잘려 로도스 섬으로 유배된 비운의 인물이었습니다.
이레네 역시 비슷한 운명이 예상되었기에 강력한 아군이 필요했습니다. 교황과 외교 관계를 맺고,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와 샤를마뉴 대제의 딸 로트루드(6세)의 혼인을 추진하며 그리스어 교사까지 보냈습니다. 하지만 프랑크와 비잔틴이 전쟁을 벌이자 이레네 스스로 약혼을 파기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시칠리아의 스트라테고스 엘피디오스가 반란을 일으켜 압바스 칼리프국에 망명, 아나톨리아 침공을 부추겼습니다. 이레네는 발칸 반도 공세를 중단하고 막대한 연공을 바치며 무슬림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습니다.

성상 복권과 아들과의 권력 다툼
한편 섭정 이레네는 78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이듬해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성상 공경을 복권시켰고, 후자에서 교황청과의 접근을 도모했습니다. 하지만 독단적 성향이 자라나는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의 반감을 샀습니다. 앞서 본 대로 어머니가 정해준 아내와 이혼한 것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레네의 독주가 강화되는 듯했으나, 결국 아르메니아계의 지지를 받은 반란이 일어나 섭정 체제는 막을 내렸습니다.
아들을 멀게 하고 '바실레우스'가 되다
모자는 공동 통치에 들어갔지만, 비잔틴의 전형적인 권모술수가 다시 발동했습니다. 797년 이레네는 아들에 대한 쿠데타를 감행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6세는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도망쳤으나 붙잡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고, 두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안구 감염으로 며칠 뒤 사망했는데, 마침 일식이 일어나 대지가 어두워지자 사람들은 이 끔찍한 행위에 신이 분노했다고 여겼습니다. 이레네는 홀로 통치자가 되었고, 여성형인 '바실리사' 대신 남성형 칭호인 '바실레우스'를 사용하며, 가짜 수염을 쓰고 파라오를 자처했던 이집트 여왕 하트셉수트처럼 군림했습니다.
샤를마뉴와의 대립, 그리고 최후
그녀가 쥔 절대 권력에 필적할 만한 서방의 인물은 샤를마뉴뿐이었습니다. 두 제국은 치열한 경쟁 관계에 놓였고, 특히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성 황제가 없다는 이유로 샤를마뉴를 황제로 대관한 것은 비잔틴 입장에서 치욕이었습니다. 샤를마뉴가 실제 그 지위를 행사하지는 못했기에 이레네의 통치는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평온하게 생을 마친 황제는 드물었습니다. 802년 귀족들과 환관들이 꾸민 또 다른 쿠데타가 성공하여 이레네는 폐위되었고, 그녀의 재무장관(게니코스 로고테테스) 니케포로스 1세가 새 황제가 되었습니다.
목숨은 건졌으나 레스보스 섬으로 유배되어 양모를 뽑아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유배 생활은 길지 않아 803년 사망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녀가 남긴 기억은 철저히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성상 공경을 되찾아주고 수도원들에 존엄을 돌려주었다는 평가가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