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미국 독립의 배경: 영국과 13개 식민지의 관계

미국 독립의 배경: 영국과 13개 식민지의 관계

7년 전쟁 이후 영국은 절정기에 달한 대영제국을 재정비하기 시작했습니다. 1770년부터 1782년까지 집권한 토리당은 식민지 지배 강화와 중앙집권화를 추구했는데, 과연 어떤 갈등이 미국 독립혁명의 씨앗이 되었을까요?

영국 제국주의

7년 전쟁 이후 영국 당국은 전성기를 맞은 대영제국을 되돌아보며 통치 방향을 재정립했습니다. 1770년부터 1782년 사이 집권한 토리당은 식민지 지배 강화와 중앙집권화를 꿈꾸었습니다.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운 그들은 상업 독점을 강화하고 해운업을 장려하며 밀수 무역을 단속하는 방식으로 중상주의 체계를 엄격하게 시행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토리당은 자유무역을 선호하는 휘그당은 물론, 미국 상인들로부터도 강한 반발에 직면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식민지 의회가 제정하고 국왕이 승인한 지방 법률이 원칙적으로 영국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보다 열위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식민지 의회들은 감사권을 행사하며 총독의 특권을 침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의회 체제'가 확산되자 런던은 1763년 이후 본국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습니다. 본국은 13개 식민지가 서부로 확장하면 권력의 균형이 깨지고 결국 독립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경제 분쟁

식민지 경제는 중상주의와 독점무역 체제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영국은 이 체계를 통해 귀금속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고 자국의 산업과 공예를 보호하려 했습니다. 무역 관계는 항해법(Navigation Acts)으로 규제되었는데, 식민지들은 영국 선박으로 원자재를 수출해야 했고, 원자재는 영국에서 가공된 뒤 해외에 판매되었습니다. 식민지에서 생산된 제품의 수출은 금지되었고, 일부 상품은 반드시 본국에서 조달해야 했습니다. 그 대가로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오직 영국 상품만 구매해야 했으며, 식민지와 거래하는 외국 선박은 관세를 납부하기 위해 영국 항구를 반드시 경유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본국과의 원거리와 미국 세관원들의 부패로 인해 세금 징수가 상당히 느슨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미국 선박들은 무역을 위해 북대서양을 불법으로 건너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중상주의의 왜곡과 미국의 경쟁력은 영국 상인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었고, 13개 식민지의 경제적 성장은 식민지 상인들과 본국 자본가들 사이에 적개심을 낳았습니다.

아메리카 정착민들, 특히 뉴잉글랜드 상인들은 차와 같은 특정 상품에 대한 유통 독점을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만성적인 화폐 부족과 영국 신용에 대한 의존 또한 큰 불만으로 여겼습니다.

미국 정체성의 형성

미국의 경제 엘리트는 본국과의 유대감을 느꼈고, 영국에 거주하는 상류층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명문 가문들은 자녀들을 영국으로 유학 보냈으며, 중상주의 체계와 그것이 보장하는 질서 덕분에 본국의 품안에 남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중산층은 영국에 대한 애착이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정착민들은 갈수록 자신을 영국인이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식민지와 주민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오히려 본국에 반대하는 '식민지 애국주의'를 촉발했고, 이는 하나의 미국적 정체성으로 발전했습니다. 17세기 이래 식민지들은 유럽의 종교 분열과 대조되는 상대적 종교 관용의 터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사회적 이동성과 광활한 북아메리카 대륙이 제공하는 기회 속에서 행복과 개인적 성공을 추구하려는 열망은 형성되어 가던 미국 정체성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정착민들 간, 식민지들 간의 불화는 적지 않았습니다. 정착 경계를 둘러싼 분쟁이 빈번했고, 같은 식민지 내에서도 이해관계가 갈렸습니다. 매사추세츠에서는 보스턴 시민들이 서부 농부들과 대립했으며, 소송을 즐기던 정착민들은 끊임없이 서로 고소하고 피소했습니다. 그럼에도 독립의 대의는 꾸준히 확산되었습니다. 정착민들이 미덕의 쇠퇴를 영국의 억압 탓으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존 디킨슨은 사적 이익이 영국인들을 길들여짐과 정신적 타락에 빠뜨렸다고 진단하기도 했습니다.

계몽주의의 영향

18세기 말 필라델피아는 학자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의 주도 아래 '혁명적 계몽주의의 진정한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이 도시는 보스턴과 함께 13개 식민지의 주요 출판 중심지였으며, 펜실베이니아 가제트(1723)는 미국 혁명기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미국철학회(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역시 벤저민 프랭클린이 설립한 토론 모임으로, 지식인들의 교류의 장이 되었습니다.

미국 혁명의 지도자들과 건국의 아버지들은 존 로크, 샤를 드 몽테스키외, 후고 그로티우스, 체사레 베카리아, 헨리 홈, 토머스 홉스 등 유럽 철학자들의 저작을 폭넓게 읽었습니다.

특히 영국 철학자 존 로크의 이론은 미국 혁명의 주역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회계약론은 백성이 지도자를 폐위할 자연권을 가진다는 논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반면 흥미롭게도 역사학자들은 미국에서 루소 사상의 흔적은 거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몽테스키외의 영국 헌법 분석과 함께 인신보호령(Habeas Corpus), 권리선언 등 영국의 문헌들을 참고하여 각 주의 헌법과 연방 헌법을 초안했습니다.

공화주의는 혁명 전야 식민지 사회를 지배하던 핵심 이념 중 하나였습니다. 정착민들은 궁정의 화려한 사치를 비판하며 검소한 공화정적 미덕을 내세웠고, 시민이 조국을 위해 싸워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갔습니다.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