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의 이베리아 반도 침공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공방전
드라마 바이킹스(Vikings)의 실제 인물들을 다룬 기사들을 연재한 바 있다. 그중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 비에른 라그나르손은 지중해 원정 중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첫 기착지로 삼았다. 당시 연대기에 따르면, 오르도뇨 1세 국왕을 대신해 이들을 격퇴한 이는 아스투리아스 기사 페드로 테온(Pedro Theon)이었으며, 그의 아들 비마라 페레스(Vimara Pérez)도 함께 참전했다. 비마라 페레스는 훗날 포르투갈의 건국자 중 한 명으로 전해진다.
최초의 바이킹 습격 (844년)
이베리아 반도에 바이킹이 상륙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4년 전인 844년, 그들은 히혼(Gijón)에 첫발을 들였다. 체류 기간이 매우 짧았던 것으로 보아, 현지 주민들과 합의하에 보급만 받고 코루냐로 향했을 가능성이 크다. 히혼 주민들은 오비에도의 라미로 1세에게 급보를 보냈고, 국왕은 에리체 형제의 갈리시아 군대와 합세해 바이킹을 맞섰다.
아스투리아스 왕조 12대 군주 라미로 1세는 산타 크리스티나 데 레나, 산 미겔 데 리요, 그리고 왕궁 별궁이었던 산타 마리아 델 나란코 등 선로마네스크 양식의 걸작들을 남긴 군주이기도 하다. 주교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와 루카스 데 투이의 연대기는 전투의 결말을 간결히 전한다. "라미로 왕이 그들을 격파하고 함대 70척을 불살랐다"고.
10세기 사료인 로텐세 연대기는 이들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교도이자 잔혹한 노르만인"이라 칭하며, 산타 마리아 데 캄포라미로에서 큰 피해를 입고 도주했다고 기록한다. 바이킹 함대는 이후 우스부나(리스본)로 향했으나 에미르국의 저항에 부딪혔고, 과달키비르 강을 거슬러 세비야까지 진출했다가 압데라만 2세에게 탈리아타(이탈리카)에서 대패했다.
두 번째 침공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포위 (858년)
기독교와 이슬람 양측 모두 해안 방어탑을 세우고 기마 전령 제도를 갖추는 등 대비했지만, 858년 62척의 바이킹 함대가 다시 나타났다. 산티아고 순례길과 연관된 부를 노린 비에른과 하스테인은 갈리시아(야코브슬란)를 목표로 아로사 만 상륙 후 이리아 플라비아를 거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포위했다. 성벽이 거의 없던 도시는 2주간 버텼으나 함락 직전, 데네겔드(철수 대가) 지급에 합의했다. 그러나 바이킹은 돈을 받고도 포위를 풀지 않았다.
페드로 테온과 비마라 페레스의 활약
극한의 상황에서 라미로 1세의 아들 오르도뇨 1세가 파견한 구원군, 프라비아 백작 페드로 테온과 비마라 페레스가 나타나 전세를 뒤집었다. 이미 데네겔드를 챙긴 바이킹은 장기전으로 피해를 키우기보다 철수를 택했다. 알벨덴세 연대기는 "그 무렵 노르만인이 다시 갈리시아 해안에 왔으나, 프라비아 백작 페드로에게 격파당했다"고 간략히 적었다. 페드로 테온은 적함 38척을 격침시켰다고 전해진다.
베일에 싸인 페드로 테온의 정체
페드로 테온의 출자는 불확실하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789~791년 잠시 재위한 베르무도 1세의 아들이라는데, 베르무도 1세는 알폰소 1세와 무슬림 노예 사이의 서자이자 마우레가토를 축출하고 즉위했다가 알폰소 2세에게 왕위를 돌려주고 부제(Deacon)가 된 인물이다. 알폰소 2세(카를로마뉴와 외교를 튼 '착한 왕') 사후 842년, 베르무도의 아들 라미로 1세가 즉위했으나 그의 혈통마저 논란거리다. 페드로 테온이 왕실 직계라는 확실한 문헌도 없다.
후일 페드로 테온은 알폰소 3세의 궁정회의(Curia Regia)에 참여하며, 866년 프루엘라 베르무데스의 반란 진압 때 국왕 편에 섰다. 알폰소 3세가 콤포스텔라 교구에 카르카시아 마을을 반환하는 증서에 서명자로 이름이 오르나, 작위 칭호가 없어 프라비아 백작설도 의문시된다. 사망일과 묘소, 자식 관계(에르메네길도 페레스와의 부자 관계도 부계명만으로 추정) 모두 불명확하다.
비마라 페레스, 포르투칼렌세 백작령의 기초를 놓다
반면 비마라 페레스는 갈리시아 태생으로 추정되며, 부왕 사후에도 알폰소 3세에게 충성을 다했다.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미뇨 강을 넘어 두에로 강 유역(현 포르투갈 영토)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해 완충지대를 구축하고 기독교도 이주를 추진 중이었다. 868년 포르투 칼레(Portu Cale, 현 빌라 노바 데 가이아) 점령으로 그는 포르투칼렌세 백작령 초대 백작이 되었고, 관할은 리미아 강에서 두에로 강, 나중에는 몽데고 강 이남까지 확대됐다.
백작령은 브라가, 비제우, 라메구, 코임브라, 산타 마리아 다 페이라 등지를 아우르며 번성했고, 마그네토(메이네두 추정)에 주교좌까지 설치됐다. 비마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정착지 비마라니스(Vimaranis)를 세웠는데, 훗날 기마랑이스(Guimarães)로 불리며 '포르투갈의 요람'으로 추앙받는다. 1143년 레온 왕국에서 독립한 포르투갈의 초대 국왕 아폰수 1세도 그의 후손이다.
비마라 페레스의 말년과 미스터리
비마라의 부인 이름은 기록에 없으나, 많은 사학자가 트루딜디(Trudildi)라는 귀족 여성으로 보며, 딸 아우비디아 비마라스는 구티에르 알로이테스 백작과 혼인했다. 아들 루시디오 비마라네스(Lucidio Vimaranes)가 873년 2대 백작으로 승계한 점으로 미루어, 비마라는 그 해 바마(Vama)라는 곳에서 사망한 듯하다. 바마는 기마랑이스와 갈리시아 두 곳에 있어 정확한 장소는 미상이나, 당시 알폰소 3세 궁정이 그곳에 머무르며 루시디오와 갈리시아 귀족 에르메네길도 구티에레스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한 기록이 있다. 에르메네길도는 루시디오의 장인이자 코임브라 영주로, 이 지역 관할권이 겹쳤던 터라 비마라의 죽음을 둘러싸고 분쟁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포르투갈의 원형이 된 인물
불확실한 기록 투성이지만, 비마라 페레스는 포르투갈 성립의 선구자로 기억된다. 1968년 조각가 살바도르 바라타 페이우(Salvador Barata Feyo)가 제작한 청동상이 포르투 대성당 앞에 서 있으며, 포르투 시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