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제2차 세계대전, 이집트 사막에 세워진 크로아티아 난민 수용소 '엘 샤트'

오늘날 난민 캠프는 우리 시대만의 슬픈 현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쟁이 몰아내는 인류의 비극은 새롭다고 할 것도 없이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왔다. 좋은 예가 바로 이집트에 있던 '엘 샤트(El Shatt)' 수용소다. 이곳은 최근 분쟁에서 온 팔레스타인인이나 레바논인, 시리아인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에서 고향을 잃은 크로아티아인들을 수용했던 곳이다.

발칸을 덮친 추축국의 공세, '슈바르츠 작전'

1943년 6월, 추축국은 발칸반도에서 '슈바르츠 작전(Operation Schwarz)'이라는 대공세를 개시했다. 목표는 적의 상륙 가능성에 대비해 아드리아해 연안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성가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게릴라)을 완전히 소탕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제5차 반파르티잔 공세'라고도 불린다.

'제5차'라는 서수가 붙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보다 앞서 티토와 그의 게릴라를 발칸에서 몰아내려는 '바이스 작전(Operation Weiss)'이 이미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은 파르티잔과 체트니크(왕당파·보수 성향의 세르비아 게릴라)를 모두 강경하고 철저하게 말살하길 원한 반면, 이탈리아는 체트니크와 타협해 이들을 파르티잔과 싸우는 데 이용하려 했다. 이런 입장 차이가 빚은 갈등은 결국 티토에게 도주할 틈을 내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집트 사막에 세워진 크로아티아 난민 수용소  엘 샤트

무자비한 진압, 그리고 전환점

이번 캠페인은 독일군 측에서 극도로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다. 이탈리아군과 불가리아군, 우스타샤(크로아티아 파시스트 민병대), 크로아티아 국민방위군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은 마을을 불태우고 민간인을 학살했다.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수티예스카강 일대에서는 후송 중이던 부상병 2천 명이 무참히 살해되었고, 장티푸스 역시 병사들 사이에서 맹위를 떨쳤다.

발칸의 험준한 지형에 몸을 숨긴 티토는 또다시 추격망을 빠져나갔지만, 승리 자체는 추축국의 몫이었다. 추축국은 친위대(SS)를 통해 해당 지역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9월, 전세를 뒤집는 전환점이 찾아온다. 연합군이 이탈리아를 해방하고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하면서 이탈리아가 옛 동맹국과 적대하게 된 것이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이 철수하면서 파르티잔은 재정비할 숨통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집트 사막에 세워진 크로아티아 난민 수용소  엘 샤트

포이베 학살과 비스 섬으로의 대피

그러나 상황은 겉보기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독일 국방군은 '구스타프 방선(Gustav Line)'을 구축해 연합군의 진격을 수개월간 저지하며 막대한 희생자를 냈다. 이는 당시 이탈리아령 달마티아 총독부 지역에 대한 새로운 독일군 공세로 이어졌다. 문제는 이곳이 이미 사실상 텅 비어 있다는 점이었다. 1943년 9월 무솔리니 실각 직후, 티토의 파르티잔이 이탈리아인들을 대량으로 처형한 이른바 '포이베 학살(Foibe massacres)'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포이베(foibe)'는 예로부터 처형된 시신을 던져 넣던 카르스트 지형의 함몰 우물을 뜻한다.

권력 공백을 틈타 독일이 지역을 장악하자, 보복이 두려웠던 수만 명의 민간인들이 집을 버리고 도피했다. 보디체, 흐바르, 비스, 코르출라, 라브니코타리, 부코비차, 그리고 무엇보다 마카르스카 출신 약 2만8천 명이 스플리트 근해 아드리아해에 떠 있는 비스 섬(약 90㎢)으로 피신했다.

비스 섬은 1941년 이탈리아에 점령된 곳으로, 준군사조직의 위협과 강압을 통해 언어와 문화까지 이탈리아화가 강요되었던 배경이 있다. 독일은 끝내 이 섬을 되찾지 못했는데, 바로 이곳의 동굴—오늘날 '티토의 동굴'이라 불리는 곳—에서 슈바르츠 작전 이후 파르티잔 지도자 티토가 몸을 숨겼고, 이후 그의 사령부가 자리 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집트 사막에 세워진 크로아티아 난민 수용소  엘 샤트

엘 샤트 수용소의 탄생

비스 섬은 나치의 지배를 벗어난 크로아티아 유일의 거점이었기에, 노인과 여성, 아이들 또한 영국군의 보호 아래 이 좁은 섬에 모여들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물류 문제였고, 결국 이들을 더 적합한 곳으로 옮기기로 한다. 처음 선택된 곳은 이탈리아 남부로, 피난민들은 바리와 타란토에 먼저 수용되었다. 그러나 아직 반도 전역이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고 폭격의 위험도 남아 있어, 조금 더 멀리 옮기는 편이 안전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수에즈 운하 인근, 이집트 시나이반도 북부의 엘 샤트 난민 수용소다. 다섯 개 구역으로 나뉜 이 시설은 매우 허술한 곳이었다. 건물 같은 것은 없었고, 한 가족이 아니라 두 가족씩 들어가야 하는 텐트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달마티아 출신 피난민들은 가능한 한 평범한 일상을 꾸리려 애썼다. 작업장, 아이들을 위한 학교, 세탁소, 교회, 합창단을 갖춘 오케스트라까지 만들었고, 심지어 신문 《나슈 리스트(Naš List, 우리의 신문)》도 발행했다.

18개월의 혹독한 세월, 그리고 희망

피난민들은 1944년 여름 이 땅에 도착해 1946년까지 머물렀다. 사막의 혹서와 물 부족, 그로 인한 각종 질병은 상당한 사망자를 냈고, 특히 어린이들의 희생이 컸다. 여기에 경비를 담당한 영국군의 통제도 매우 엄격해, 수용소 밖으로 나가려면 특별한 허가가 필요했다. 마치 난민이 아니라 포로 취급을 받는 듯한 대접이었다.

그럼에도 이 극한의 18개월 동안 삶과 희망은 길을 찾았다. 그 시절 이곳에서 5천 건의 결혼과 650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1946년 초,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마침내 유고슬라비아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수용소는 철거되었지만 기억은 남았다.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불행히도 크게 훼손된 825기의 무덤이 있는 묘지와, 2003년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가 그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