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엄 '빌리' 에드워드 싱(William Edward Sing)은 중국계 혈통을 지닌 호주인이었다. 1886년 호주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만연했던 인종차별적 편견을 뛰어넘고 사격 대회에서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타고난 명사수임을 입증했다.
1914년 10월 24일, 신장이 165cm에 불과하다는 점을 모집 장교가 눈감아 주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서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제5경기병연대에 임관했다. 갈리폴리 전역이 시작되자 그의 연대는 호주뉴질랜드군단(ANZAC)의 일원으로 갈리폴리로 파병되었다.
채텀 포스트에서 벌어진 저격전
갈리폴리에서 터키군은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상태였고, 낮은 지대에 있던 호주군은 사실상 깎아내듯 학살당하고 있었다. 풍부한 경험을 인정받은 빌리는 저격수로 배치되었고, 이온 '잭' 이드리스(Ion "Jack" Idriess), 이후에는 톰 시핸(Tom Sheehan)이 관측수를 맡았다. 빌리가 임무를 수행한 곳은 호주군이 '채텀 포스트(Chatham Post)'라 부르던 지점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빌리 싱은 문자 그대로 역사를 만들었다. 표준적인 영국제 7.7mm 리-엔필드 소총을 들고 그는 터키군을 차례차례 처치해 나갔다.
터키군 포격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는 종종 터키 진지 근처의 사각지대에 매복했다. 그의 화망은 결국 한 곳이 아닌 세 개의 진지를 동시에 커버했다. 거리 350m의 터키군 참호, 500m의 통신 참호, 그리고 900m의 통행로였다.
빌리 싱은 때때로 자신이 죽인 터키군 병사들을 생각하면 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동료들이 터키군에게 당한 일을 떠올리면 그런 마음도 금세 사라졌다. 한편 그의 동료 중 한 명은 인터뷰에서 그를 "강철 같은 신경을 지닌, 유난히 단단한 사나이"로 묘사했다.
터키 엘리트 저격수와의 결투
빌리 싱을 제거하기 위해 터키군은 자국의 엘리트 저격수를 최전선에 파견했고, 호주군은 그를 '공포의 압둘(Abdul the Terrible)'이라 불렀다. 어쩌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 저격수 자이체프와 독일 저격수가 벌인 유명한 대결 이야기도 이 실화에서 영감을 받았을지 모른다.
터키 저격수는 며칠간의 관찰 끝에 빌리가 채텀 포스트에 매복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맞은편에 진지를 구축했다. 며칠 후 싱의 관측수가 표적으로 보이는 형체를 발견했다. 압둘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싱이 먼저 그를 포착해 단 한 발로 즉사시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터키군 포병은 그들의 진지를 집중 포격해 갈아엎었고, 두 호주 병사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저격수 싱의 전성기였다. 1915년 8월 그는 독감에 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측수와 함께 부상을 입었다. 잘못 기획된 갈리폴리 전역이 끝날 때까지 싱은 터키군에게 200명이 넘는 확정 전과를 올렸지만, 정확한 숫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자료는 119명 또는 150명이라 주장하는 반면, 군단장 버드우드(Birdwood) 중장은 201명이라 기록했고, 미넬리(Mignelli) 소령은 싱이 거의 300명의 터키군을 죽였다고 보고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중장이 한때 직접 싱의 관측수를 맡았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동료들은 그를 '살인마(the killer)', '죽음의 천사(angel of death)'라 불렀다.
그러나 1915년 11월 싱은 다시 크게 병들었다. 그는 병원선에서 2주간 치료를 받은 뒤 이집트로 후송되었다. 회복 후에는 보병으로 전속하여 왕립 퀸즐랜드 연대 제31대대에 배속되었다.
서부 전선에서
1917년 1월 싱은 서부 전선에 도착했고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다. 그에게 마지막 자유 사격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적의 화학 가스 공격 중이었다. 요양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보내진 그는 그곳에서 웨이트리스를 만나 결혼했지만, 이 결혼은 행복하게 끝나지 못했다. 1917년 8월 그는 서부 전선으로 복귀했으나 건강 상태가 이미 예전처럼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1917년 9월 폴리곤 우드(Polygon Wood) 전투에서 특히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벨기에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입원했는데, 사실 그의 건강은 가스 피해로 인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1918년 2월 독일군의 포화에 다시 크게 부상당할 때까지 전선에서 싸웠다. 폐가 심각하게 손상된 가운데 중상을 입은 싱은 마침내 제대하여 1918년 7월 호주로 돌아왔다.
잊혀진 영웅, 불운한 말년
군은 싱의 건강이 전투 복무로 인해 손상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지만, 정작 그를 돕지는 않았다. 결국 생계를 꾸리기 위해, 비참한 건강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는 광부로 일해야 했다. 그의 아내는 끝내 호주까지 따라오지 않았다. 갈리폴리의 잊혀진 영웅이자 터키군의 공포였던 그는 남은 생애를 고통과 가난 속에서 보냈다.
그는 1943년 5월 16일, 호주 브리즈번의 판잣집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중 홀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판잣집에서 발견된 재산은 겨우 5실링뿐이었다. 1995년, 그가 생을 마감한 바로 그 자리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