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히틀러를 협박하려다 실패한 남자, 요제프 그라이너

1938년, 나치즘은 절정의 권력을 구가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병합되고 수데텐란트도 곧이어 독일의 품에 안겼으며,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유화 정책으로 괴물을 달래려 애썼다. 가을에는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추방당했고, 11월 9일에는 소위 '깨진 유리의 밤(Kristallnacht)'이라 불리는 반유대주의 폭거가 자행됐다.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히틀러에게 돈을 뜯어내려 시도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고, 그 주인공은 수년 전 히틀러를 만났다고 자랑하던 한 무명 작가였다.

제3제국의 출범과 히틀러의 권력 장악

그로부터 4년 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서거하자 히틀러는 총리직과 대통령직을 합쳐 '총통(Führer)' 칭호를 얻고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된 이 투표로 소위 '천년 제국'이라 불리던 제3제국이 막을 올렸다. 이 체제에서 충성의 대상은 국가나 헌법이 아닌, 당의 이념적 원칙을 체현한 총통 개인에게 향하게 되었다.

이후 몇 년간 독일은 군비 확장을 중심으로 한 경제 정책과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병행하며 재공업화에 나섰다. 히틀러 스스로 국방군 최고사령관을 자처한 가운데, 독일은 겉보기엔 강대국으로 부상했지만, 실상은 무기 생산에 치중한 경제 구조 탓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빈민굴에서 만난 두 남자

이러한 영광의 나날과는 대조적으로, 히틀러의 출발점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세관 공무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사촌과 결혼한 아버지가 자주 폭력을 휘두르는 가정 환경 탓에 학업에 실패했다. 성인이 되어 화가의 꿈을 안고 빈으로 상경했으나, 빈 미술 아카데미 입시에 거듭 낙방하며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한동안 멜데만슈트라세 27번지(Meldemannstraße 27)라는 공립 남성 기숙사에서 지내며 수프 키친으로 끼니를 잇고, 페인트 통을 채워 방문 판매하는 등 온갖 막노동으로 연명했다.

요제프 그라이너, 또 다른 방랑자

여기서 우리는 히틀러의 전기에서 잠시 눈을 돌려 요제프 그라이너라는 인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히틀러보다 3년 앞서 슈타이어마르크(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1908년 빈으로 이주했다. 히틀러가 1910년 2월 해당 기숙사에 입소했을 때, 그라이너는 이미 1월부터 4월까지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최소 두 달간 같은 공간에서 지냈고, 페인트 통 채우기 아르바이트를 함께 하며 알게 된 사이였다. 이 기숙사는 1990년대까지 운영되다 폐쇄되었고, 2009년 '브리기테나우 양로원(Seniorenschlössl Brigittenau)'으로 재개장했다.

각자의 길, 극명하게 갈린 운명

이후 두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궤적을 그렸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두 차례 부상당하고 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패전의 굴욕과 베르사유 체제에 반발해 극우 민족주의, 반공주의, 반유대주의를 아우르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을 1921년 장악했다.

반면 그라이너는 변변치 않은 문필 활동을 이어갔다. 본론과 관련된 사건은 1938년, 그가 총리 관저로 보낸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된다. 『Sein Kampf und Sieg. Eine Erinnerung an Adolf Hitler』(그의 투쟁과 승리: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회상)라는 제목의 이 책에서 그는 수십 년 전 빈의 기숙사에서 히틀러와 한방을 쓰며 가난을 함께 견뎠던 추억을 풀어놓았다.

선물인가, 협박인가

그라이너는 이 책을 무솔리니, 괴링, 괴벨스에게도 보냈다. 특히 괴벨스에게는 이 글이 히틀러의 고난 극복 서사를 강화하는 선전 자료로 쓰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히틀러는 이 책의 헌정과 내용, 그리고 그라이너가 보답으로 경제부 장관 자리를 요구한 사실(그는 자신을 사업가라 칭했다)을 종합해 볼 때, 교묘한 협박 시도로 간주했다. 즉시 금서 조치가 내려졌고 출판된 서적은 모두 압수되었다.

기회주의자의 이중 행각

그의 진심을 알 수는 없으나, 후속 행보를 보면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임이 분명하다. 히틀러를 '천재', '메시아'라 칭송하며 아부하던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47년, 정반대의 내용을 담은 신간 『Das Ende des Hitler-Mythos』(히틀러 신화의 종말)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히틀러를 유대인 학살자, 모델 강간범, 레오폴트슈타트(빈의 유대인 지구) 매춘부와의 관계로 매독에 걸린 인물로 묘사했다. 하지만 사실관계 오류가 즐비하다. 히틀러가 1908년 빈에 있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1910년 도착했으며, 히틀러가 빈에서 누드 모델을 그렸다는 주장도 거짓이다(히틀러는 건축물 스케치를 선호했다). 1945년 히틀러가 벙커에서 자살하지 않고 비행기로 탈출했다는 황당한 주장, 자신은 나치당원이 아니었기에 저항 운동에 가담했다는 변명(실제로는 여러 번 입당 신청했다가 거절당함) 등은 그의 신빙성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현재 정부 문서 보관소에는 그를 단단한 '협박범'으로 기록하며, 실제로는 히틀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더 믿을 만한 증언자, 라인홀트 아니슈

이 이야기의 더 신뢰할 만한 출처는 1939년 미국 잡지 The New Republic에 게재된 라인홀트 아니슈(Reinhold Hanisch)의 증언이다. 그라이너와 달리, 그가 빈에서 히틀러와 동거하며 수채화를 그려 팔아 생계를 꾸린 '동업자'였음은 입증된 사실이다.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의 오스트리아 이민자였던 아니슈는 히틀러가 그린 그림을 팔아 수익을 나눴다.

하지만 그도 깨끗한 인물은 아니었다. 절도죄로 복역한 전력이 있었고, 히틀러의 그림 한 점 판매 대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결별했다. 이후 히틀러가 새 판매상을 구하자, 경쟁자가 된 아니슈를 고발해 일주일 징역을 살게 했다. 출옥 후 아니슈는 히틀러를 악의적으로 헐뜯으며 '게으르다', '노동자 경력이 없다', '유대인 친구가 있다'는 등의 루머를 퍼뜨렸다. 1920~30년대에는 히틀러의 위작 수채화를 팔아 또다시 수감되기도 했다. 1936년 재수감 당시 그의 방에서 히틀러 관련 원고 다수가 발견되었고, 1937년 옥사할 때까지 힘러는 그의 저작과 그림을 수거해 파기하려 했다. 일부 살아남은 원고가 앞서 언급한 미국 잡지에 실렸으나, 그 진위조차 온전히 신뢰하긴 어렵다.

브라질에서 생을 마감한 협잡꾼

그라이너는 굴하지 않고 1947년 스탈린에게도 『히틀러 신화의 종말』을 보내며, 소련과 독일 간 무역 관계 중재자 역할을 자청했다. 하지만 그해 브라질에서 사망하며 그의 야망은 끝났다. 흥미롭게도 아마존 지역에는 1936년 나치의 '가이아나 작전(Operation Guyana)' 원정대원으로 사망한 요제프 그라이너의 묘소가 존재한다. 동일 인물인지, 우연한 이름 충돌인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