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폭발물 1,400톤을 실은 채 템스 하구에 좌초된 SS 리처드 몽고메리호, 80년째 방치된 거대 시한폭탄

템스 하구에 잠든 거대 시한폭탄

배를 즐기는 항해 애호가라면 누구나 위험한 해역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영국 쉬어니스(Sheerness) 인근 템스 강 하구다. 이곳에는 악명 높은 노어(Nore) 모래톱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진짜 걱정거리는 장소 자체가 아니라, 수면 위로 반쯤 드러난 채 방치된 SS 리처드 몽고메리(SS Richard Montgomery)호의 잔해다. 이 배는 폭발물로 가득 차 있다.

난파선은 대개 사고 당시 실었던 화물을 선창에 그대로 간직한 채 침몰한다. 귀금속이나 금괴 같은 가치 있는 화물은 회수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승선원들과 함께 해저에 남아 일종의 수중 묘지가 된다. 수은이나 방사성 폐기물처럼 성질이 위험한 화물이라면 그 자체로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소개할 사례는 이보다 훨씬 직접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악명 높은 노어 모래톱

노어 모래톱은 템스 강이 북해와 만나는 지점을 표시한다. 자연적으로 위험한 해역이어서 1732년에는 세계 최초의 등선(燈船)이 이곳에 항구적으로 정박하기도 했다. 이곳의 이름에 부정적인 의미가 더해진 것은 그보다 뒤인 1797년 5월의 일이다. 이 해역에 집결하던 왕립해군 함선들의 선원들이 열악한 선상 생활과 임금 체불에 항의하며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주모자들은 처형됐지만, 해군성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선책을 마련했다.

이후 수세기 동안 템스 강 어귀는 지켜야 할 요충지로 여겨져 주변에 요새가 세워졌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안 포대와 대공포가 설치됐다. 바로 그 전쟁 중에 SS 리처드 몽고메리호의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이 배는 노르망디 상륙작전(D데이)이 있던 지 한 달 뒤, 호위 함대와 합류해 영국 해협을 건너 노르망디 해안으로 향하기 위해 템스 하구에서 대기 중이었다.

리버티급 화물선 SS 리처드 몽고메리호

이 배는 미국 세인트존스강 조선소(St. Johns River Shipbuilding Company)가 건조한 82척의 동형선 중 일곱 번째였다. 미국이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에 따라 영국에 공급하기 위해 구상한 리버티(Liberty)급 상선들로,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입은 영국 함대의 손실을 메우기 위한 군수 화물선이었다.

배의 이름은 미국 독립전쟁에서 베네딕트 아널드가 이끈 퀘벡 공격전에서 전사한 아일랜드계 장군 리처드 몽고메리에서 따왔다. 1943년 6월 15일에 진수되어 7월 29일에 준공됐으며, 전장 128.88미터, 폭 17.37미터, 흘수 8.48미터에 두 개의 프로펠러로 11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고, 총 배수량은 14,474톤이었다. 여러 차례 성공적인 항해를 마친 뒤, 1944년 8월 윌키(Wilkie) 함장의 지휘 아래 필라델피아 델라웨어 강 하구의 호그아일랜드(Hog Island)항을 출발해 잉글랜드로 향했다.

정박 실패, 그리고 좌초

배에는 유럽 전역의 연합군 포병과 공병 부대에 공급할 폭발물 6,127톤이 실려 있었다. 최종 목적지는 프랑스 셰르부르(Cherbourg)항이었고, 템스 하구에서 호위 함대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지정된 해역에 도착하자 항만당국 관리인(하버마스터)은 켄트주 쉬어니스 북부의 정박지 '그레이트 노어(Great Nore)'에 닻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재앙이 닥쳤다. 8월 20일 닻을 내렸지만 모래 바닥에 닻이 박히지 않았고, 배는 모래톱 쪽으로 위험하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함께 대기하던 다른 선박들이 경적을 울려 위험을 알렸지만, 정작 배에 탄 사람 중에는 그 신호를 해독할 줄 아는 이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함장은 선실에서 자고 있었는데, 기막히게도 깨워 주는 사람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는 셰피 섬과 그레인 섬 사이, 템스 하구로 흘러드는 작은 강인 메드웨이 강 어귀에서 250미터 떨어진 곳에 좌초됐다. 그 지점의 수심은 7.3미터로, SS 리처드 몽고메리호의 흘수보다 1미터나 얕았다. 게다가 선창이 가득 찬 상태라 흘수가 1미터 더 늘어난 상태였다. 이후 조사에서는 함장의 책임을 면제하고 항만당국에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그 사이 난파선은 쉬어니스에서 불과 2.5킬로미터 떨진 곳에 거대한 폭탄 하나를 남겨 두었다.

구조 작업과 좌초된 1,400톤의 폭발물

좌초된 배는 파도에 선체가 순식간에 부서질 수 있다. 그래서 서둘러 구조반이 꾸려졌는데, 목표는 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화물을 옮기는 것이었다. 로체스터(Rochester)의 부두 노동자들이 작업을 맡아 나흘 뒤인 24일 시작했지만,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선체가 부서지면서 누수가 발생해 선수 쪽 선창 여럿이 물에 잠긴 것이다.

작업은 필사적으로 계속됐으나 9월 25일에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었고, 모든 인원이 배를 떠났다. 배는 이후 둘로 갈라졌다. 화물 상당량은 옮겼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선상에는 TNT, 다양한 종류와 무게의 폭탄, 집속탄과 파편탄, 백린탄, 뇌관, 연막탄, 신호용 화공품 등 1,400톤의 폭발물이 그대로 남았다.

폭발물 1,400톤을 실은 채 템스 하구에 좌초된 SS 리처드 몽고메리호, 80년째 방치된 거대 시한폭탄

키엘체호 폭발 사고가 남은 교훈

전쟁 중에는 히틀러가 필사적으로 쏘아대던 V-1·V-2 비행폭탄의 런던 공습을 막는 일이 최우선 과제였으므로 이 문제가 뒷전으로 밀린 것은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인양 계획이 실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정타는 1967년의 키엘체(Kielce)호 폭발 사고였다.

키엘체호는 1946년 켄트주 폴크스톤(Folkestone) 앞바다, 육지에서 3~4마일 떨어진 더 깊은 수역에 침몰한 폴란드 화물선으로, SS 리처드 몽고메리호와 비슷한 양의 폭발물을 실고 있었다. 1967년 7월 화물을 인양하던 중 폭발이 일어났다. 그 위력은 해저에 6미터 크기의 분화구를 만들었고, 전문가들은 리히터 규모 4.5의 지진에 필적하는 충격이라고 평가했다. 폴크스톤에서는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황이 번졌다. 기적적으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이 사태를 SS 리처드 몽고메리호에 적용해 보면 폭발 시 폭 300미터의 수주(水柱)가 솟고 배의 파편이 최대 3,000미터 높이까지 날아가 쉬어니스의 건물들을 파손하며, 5미터 높이의 거대 해일까지 발생할 것으로 계산됐다.

폭발물 1,400톤을 실은 채 템스 하구에 좌초된 SS 리처드 몽고메리호, 80년째 방치된 거대 시한폭탄

이후 예상 피해 규모는 다시 산출됐지만 여전히 파괴적이었다. 해일은 훨씬 작아지겠지만 켄트 연안 여러 지자체에 홍수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모든 인양 계획은 보류되고, 해도에 난파선을 위험 항해물로 표시하고 정확한 위치를 표기한 뒤, 주변에 육안 및 레이더 감시를 갖춘 배제구역을 설정하는 방식으로 전환됐다.

오늘날의 위험도 평가

과거에는 폭탄 부품 속 납과 구리가 물과 접촉하며 생성되는 아지화구리(copper azide)가 폭발에 매우 민감할 것으로 우려됐다. 특히 수면 위로 드러난 선체 파편과의 충돌이나, 조류·폭풍으로 인한 화물의 격한 이동이 위험 요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렇게 오랜 세월 염수의 부식 작용이 뇌관에 작용해 더 이상 폭발 위험이 없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영국 해양해안경비청(MCA)도 이런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안전을 위해 갈라진 선체 두 부분은 주기적으로 검사하며 구조 상태를 평가하고 있다. 선체는 느리지만 꾸준히 열화되고 있으나, 당장 붕괴를 우려할 만한 징후는 없다. 따라서 단기·중기적으로 난파선에 손을 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상황은 새로운 변수를 맞이했다. 템스 하구에 새 런던 공항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추진되면서, SS 리처드 몽고메리호를 그 자리에 두어야 하는지를 놓고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