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중세 종교재판의 실상: 카타리파 이단에서 종교재판소 설립까지

중세 종교재판이란 무엇인가?

중세의 종교재판(Inquisition)은 13세기에 빈번해진 '이단죄'를 심판하기 위해 설립된 법정이었다. 라틴어로 Inquisitio haereticae pravitatis, 즉 '이단의 사악함에 대한 조사'라 불린 이 제도는 흔히 종교재판으로 알려져 있으며, 123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교서 Licet ad capiendos를 반포하면서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종교재판의 역사는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주제 중 하나다. 그 이유는 이 제도의 목적에 대한 혼란과 무지, 그리고 창설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 부족에 있다. 중세의 종교재판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중세 후기에 널리 퍼졌던 카타리파(Catharism)라 불리는 이단 운동을 먼저 알아야 한다.

카타리파: 두 신을 믿는 이단

카타리파(그리스어로 '순수한 사람'이라는 뜻)는 고대 영지주의(Gnosticism)의 요소를 계승한 이단으로, 선한 신과 악한 신, 두 명의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카타리파에게 물질 세계 전체와 인간의 육체는 악한 신이 창조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모든 것은 부패하고 죽음이라는 필연적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반면 선한 신은 인간의 영혼을 창조했으며, 영혼은 육체로부터 해방되면 다시 순수함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카타리파는 그리스도를 바로 이 선한 신으로 여겼다.

문제는 이러한 신앙이 사회 질서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 카타리파는 자녀를 낳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에게 출산이란 순수한 영혼을 '육체의 감옥'에 가두는 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비파와 교회의 대응

카타리파 분파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알비파(Albigensians)였다. 이들은 매우 정교한 조직을 갖추고 수천 명의 추종자를 끌어모았다. 가톨릭 교리 입장에서 카타리파주의는 극히 심각한 문제였는데, 그들이 삼위일체(성부·성자·성령)를 부인했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인성, 즉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교리마저 거부했기 때문이다.

알비파를 비롯한 카타리파의 활동은 박해와 소규모 전쟁, 린치 등 격렬한 민중 폭력을 촉발시켰다. 이 상황에 대한 첫 번째 의미 있는 조치는 1184년 교황 루치우스 3세와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주재한 베로나 시노드였다.

그러나 카타리파와 기독교도 간의 갈등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더욱 커졌고, 이단은 점차 신도를 늘려갔다. 1198년 베드로의 후계자로 즉위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공직에서 이단자를 배제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훨씬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또한 인노첸시오 3세의 승인 아래, 잘 조직된 카타리파의 군대에 맞서기 위한 대알비 십자군이 일어났다.

종교재판소의 설립

12세기의 격동기를 지나 13세기에 들어서도 카타리파 이단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많은 경우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 은밀히 활동했다. 이에 교회는 이단 혐의를 받은 자가 실제로 이단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사법 조사 기구, 즉 '심문 법정'을 마련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렇게 하여 그레고리우스 9세가 1233년 성종교재판을 창설한 것이다.

통념과 달리, 종교재판은 중세나 근세에 수백만 명을 처형하지 않았다. 근세 이베리아 국가들에서는 왕권이 종교재판을 세속적 통치 도구로 이용하면서 더욱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긴 했지만, 그 역시 흔히 알려진 통념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고문에 대한 과장된 통념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1252년 교서 Ad extirpanda를 통해 고문을 허용한 사례 역시 일부 저술가들에 의해 과장되어 왔다. 이 교서는 교황이 제국 권력의 특성을 교회에 귀속시켰다는 점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지만, 고문은 극히 특수한 경우에 한해서 사용되었으며 결코 모든 심문관의 일상적인 관행은 아니었다. 역사가 레지느 페르누(Regine Pernoud)는 저서 『중세를 비추는 빛(Light on the Middle Ages)』에서 중세 종교재판의 사형과 고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심문관 베르나르 기(Bernard Gui)가 경력 동안 내린 930건의 유죄 판결 가운데 사형에 이른 것은 모두 42건에 불과했다. 고문에 관해서는 랑그독(Languedoc) 지역 종교재판 전체 역사에서 확인된 사례가 단 세 건뿐이다. 다시 말해 고문의 사용은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문이 적용되려면 어느 정도의 증거가 이미 확보되어 있어야 했으며, 고문은 이미 이루어진 자백을 보완하는 용도로만 쓰일 수 있었다. 덧붙여 다른 모든 교회 법정과 마찬가지로 종교재판 법정에는 예비 구금 제도가 없었으며, 유죄가 입증될 때까지 피고는 자유로운 신분으로 남았다.”

또한 주목할 점은, 유죄 판결을 받은 이단자를 실제로 처형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세속 권력, 즉 민간 당국이라는 사실이다. 교회는 판결을 받은 자를 세속 권력에 넘겼을 뿐이다.

참고 문헌

[1] PERNOUD, Regine. 『중세를 비추는 빛(Light on the Middle Ages)』. 안토니우 마누엘 드 알메이다 곤살베스 옮김. 멤 마르팅스: Publications Europe-America, 1997. 90~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