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르노보 반란: 그리스인이 이끈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발칸 봉기
1598년 불가리아 투르노보에서 일어난 반란은 발칸 전역을 아우르는 초국경적 운동이었다. 주도한 인물들은 투르노보 주교 디오니시오스 랄리스, 니코폴리스 출신 불가리아 보야르 테오도르 발리나, 라구사(현 두브로브니크) 출신 크로아티아인 파벨 도르티치, 테오파네스·예레미아·메토디오스·스피리돈 주교, 그리고 세르비아 형제 소르코셰비치였다.
배경: 미하일 용감공의 승리가 불어넣은 희망
1595년 왈라키아의 군주 미하일 용감공은 칼루가레니에서 벌어진 유명한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대파하며 발칸의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해방의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는 곧 합스부르크 황제 루돌프 2세의 지원을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스만이 지배하던 불가리아로 진격해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었다.
같은 시기 그리스인과 불가리아인들이 소피아에서 봉기해 오스만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타타르 기병을 앞세우자 미하일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봉기는 진압되었다. 그럼에도 도르티치는 미하일과 접촉해 남부 발칸으로의 진군을 준비했다.
반란 준비: 국제적 연대 구상
이런 흐름 속에서 불가리아의 옛 수도 투르노보를 중심으로 반란 준비가 진행되었다. 디오니시오스, 발리나, 도르티치는 합스부르크 가문과도 긴밀히 연락했다. 프라하에서 황제를 직접 알현했고, 트란실바니아의 군주 바토리와도 만나 오스만에 대항하는 광범위한 동맹을 조율하려 했다. 1597년 빈에서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졌지만, 안타깝게도 종이 위의 설계에 머물렀다.
미하일은 다시 불가리아로 돌아와 봉기의 구호를 내걸었다. 주교 디오니시오스는 랄리스 가문과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명문 혈통 출신으로, 칸타쿠지노 가문과 미하일 용감공의 친척이기도 했다. 남아 있는 서신이 보여주듯 그는 미하일과 꾸준히 연락하며 오스만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서신 한 통에서 디오니시오스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멜레티오스 피가스 역시 혁명 운동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서신에서 그는 미하일의 군대와 합스부르크 황제의 군대가 나타나면 발칸 전역이 들고일어나 무려 20만 명의 병력을 규합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봉기의 전개와 좌절
마침내 봉기가 일어났다. 불가리아 왕조의 후손(발리나로 추정되는 인물)이 '시슈만 3세'라는 이름으로 차르에 추대되었다. 반군은 도시를 탈환하고 1만 2천 명의 병력을 규합했으며, 혁명의 불길은 투르노보에서 오흐리드, 소피아, 세르비아의 니시까지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대응은 신속하고 강력했다. 당시 기록이 혼란스럽긴 하지만, 미하일이 진격해 반군과 합류하지 못하고 후퇴한 끝에 1599년 오스만과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봉기는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진압과 여파
반란은 오스만 특유의 무자비함으로 짓밟혔다. 수천 명의 기독교도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고, 최소 5만 명이 왈라키아로 피신해 그곳에 정착해 남았다.
그럼에도 저항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이 움직임은 또 다른 그리스인 주교 디오니시오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적들에게 '스킬로소포스'라 불린 그는 1600년 테살리아에서, 이어 1611년에는 이안니나에서 새로운 봉기를 조직했다.

차이두코스, 발칸의 '도적(클레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