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내전의 시대
프랑스 국민 군주제는 16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형성되었으며, 이를 통해 프랑스는 근대 시대 최강국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물결이 일면서 유럽은 본격적인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 영국 제도에서 프랑스,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에서 귀족 가문 간의 왕위 계승 전쟁이 종교적 대립으로 한층 격화되며 근대 초기의 정치·사회·경제적 흐름을 좌우했습니다. 같은 시기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아메리카 대륙에는 식민지 체제가 구축되었습니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전반기에 걸쳐 종교 내전이 초래한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절대왕정 모델이 등장했습니다. 이 모델은 바로 프랑스 국민 군주제의 형성에서 가장 완숙한 형태를 이루게 됩니다.
리슐리외 추기경과 절대왕정의 기초
프랑스 절대국가, 곧 프랑스 국민 군주제의 형성은 프랑스에서 절대주의 체제를 확립하려는 움직임과 직결됩니다. 그 핵심 설계자는 아르망 장 뒤 플레시, 즉 리슐리외 추기경(1585~1642)이었습니다.
리슐리외는 1624년 마리 드 메디시스 왕비의 발탁으로 프랑스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프랑스 정치 체제의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행정권을 강화하고 왕권신수설을 앞세웠으며, 자신의 개혁에 장애가 되는 귀족들을 단호히 배척했습니다. 왕비마저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30년 전쟁이라는 시련
프랑스 국가의 기반을 다진 리슐리외의 권력은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거대한 시련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이 전쟁은 신성로마제국의 권위, 즉 유럽 모든 왕좌의 통합을 추구하던 세력에 맞서 근대적 공국들과 민족 국가들이 싸운 전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은 참전국 모두에게 막대한 부담을 안겨주었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비로소 막을 내렸습니다.
프롱드의 난과 마자랭의 과제
프랑스는 승전국 가운데 하나였지만 경제는 파탄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리슐리외 사후에는 마자랭 추기경이 국가 경제 재건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세금 인상 등 마자랭의 정책은 지나치게 백성의 반발을 샀고, 결국 대규모 민중 봉기로 번졌습니다. 이른바 '파리의 프롱드' 반란으로, 민중들은 루브르 왕궁까지 점거하는 사태를 벌였습니다.
루이 14세와 절대왕정의 완성
프랑스 국가는 1661년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루이 14세 치세에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완숙한 구조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는 '태양왕'으로 불린 군주이기도 합니다.
루이 14세 시대에 왕권신수설이 온전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통치 구조는 측근 고문단을 기반으로 했으며,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각 주의 총독으로 성장했습니다. 모든 권력의 원천은 오직 국왕에게서 뿜어져 나왔습니다.
한편 프랑스의 상선과 해군 역시 이 시기 재무장관 콜베르의 활약 덕분에 크게 강력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