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Anglican Church)는 헨리 8세(Henry VIII)에 의해 시작된,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결과물입니다.

종교개혁과 영국의 특수성
종교개혁은 유럽 대륙 여러 지역에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으로 전개된 과정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파, 칼뱅파, 그리고 잉글랜드의 성공회(Anglican)라는 세 가지 주요 사례로 구분하여 학습합니다.
다른 경우들과 달리,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가톨릭 성직자들의 교리와 관행을 비판하던 신학자들이 아니라 한 국왕의 주도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잉글랜드 군주 헨리 8세가 로마 교회와 갈라선 직접적인 계기는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보낸 이혼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헨리 8세의 이혼 문제
헨리 8세는 스페인 출신 귀족인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과 결혼했습니다. 이혼을 요청한 이유는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할 후손을 남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캐서린이 낳은 여섯 명의 자녀 중 오직 공주 마리아만 살아남았습니다.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궁정의 귀부인 앤 볼린(Anne Boleyn)과 결혼하여 후계자가 될 아들을 얻고자 했습니다.
교황의 승인이 거절되자, 잉글랜드 국왕은 1533년 국내 법원을 통해 여왕과의 이혼을 선언했습니다. 1년 뒤 헨리 8세는 클레멘스 7세에 의해 파문당했습니다.
단순한 이혼 문제가 아닌 깊은 배경
그러나 헨리 8세가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게 된 데에는 교황의 이혼 거부만이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잉글랜드와 로마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백년전쟁(1337~1453)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소위 서방 교회 대분열 시기 아비뇽에 위치한 고위 가톨릭 성직자들은 잉글랜드보다 프랑스에 더 가까웠습니다. 또한 적어도 15세기 말부터 잉글랜드에서는 가톨릭 성직자에 대한 심각한 비판이 존재했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였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교리 문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잉글랜드 사회에서도 사치스럽게 행동하는 가톨릭 성직자들의 태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수권법과 성공회의 탄생
헨리 8세가 파문된 후 잉글랜드에서는 수권법(Act of Supremacy)이 제정되어, 잉글랜드 군주가 잉글랜드 국교회의 최고 수장이 되었습니다. 이 조치로 소위 성공회가 탄생했습니다. 이제 잉글랜드 국왕은 성직자 임명권을 갖게 되었고, 종교적 사안에 대한 결정권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 조직 구조는 기존 체제를 유지했으나, 이후 존 칼뱅이 발전시킨 신학 교리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경제적으로는 잉글랜드 국가가 가톨릭 교회의 모든 재산, 특히 수도원의 토지를 몰수하여 다양한 귀족, 상인, 농민들에게 판매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상업과 초기 자본주의 경제 활동에 연계된 지배 계급인 젠트리(gentry)층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을 새긴 인장.*
역사의 아이러니
운명의 아이러니였던 것은, 헨리 8세가 앤 볼린 사이에서도 아들을 얻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부부의 딸 엘리자베스는 훗날 여왕이 됩니다. 앤 볼린은 혼외 정사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1536년 처형되었습니다. 헨리 8세는 이후 네 번 더 결혼했고, 세 번째 결혼에서 아들 에드워드를 얻어 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다섯 번째 결혼 역시 비참하게 끝났는데, 그의 아내 캐서린 하워드 역시 혼외 관계로 인해 처형당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성공회 확립
영국 성공회(안글리커니즘)는 누이 마리아 튜더가 왕국 내 가톨릭 복원을 시도한 이후, 엘리자베스 1세(1558~1603)의 통치 기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확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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