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네덜란드의 브라질 침공: 이베리아 연합과 설탕 무역을 둘러싼 17세기 전쟁

네덜란드의 브라질 침공은 17세기 전반기 네덜란드가 브라질 북동부를 점령하기 위해 조직한 군사 원정을 의미합니다. 이 침공의 배후에는 이베리아 연합과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 3국 사이의 외교 관계가 얽혀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1630년 페르남부쿠 카피타니아를 정복하고 식민지를 세웠으며, 이 식민지는 1654년 포르투갈이 네덜란드를 축출하고 지역을 되찾을 때까지 약 24년간 존속했습니다. 특히 1637년부터 1643년까지 마우리츠 데 나사우가 다스린 시기가 네덜란드 식민지의 전성기로 꼽힙니다.

네덜란드 침공의 역사적 배경

브라질에서 벌어진 네덜란드의 침공은 이베리아 연합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1580년 포르투갈 국왕 엔히크 1세가 직계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위기가 시작되었고, 세 명의 왕위 요구자 가운데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있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군사력을 앞세워 입장을 관철시켰고, 결국 포르투갈 왕위에 올라 두 왕관을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이로써 포르투갈의 모든 속령은 사실상 스페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이는 양국 외교 질서의 재편은 물론 포르투갈의 대외 정책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16세기 말 포르투갈이 브라질에서 벌이던 핵심 경제 활동은 설탕 생산이었습니다. 이 사업은 네덜란드의 자금 지원으로 발전했고, 설탕 정제와 유럽 내 유통 역시 네덜란드가 담당했습니다. 즉,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사이에는 긴밀한 경제적 파트너십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네덜란드와 스페인은 80년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 아래 있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을 몰아내는 것으로 보장되는 독립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속령이 스페인의 통제를 받게 되자, 네덜란드인들이 수익성 높은 설탕 사업에서 배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침공의 전개 과정

네덜란드의 브라질 침공: 이베리아 연합과 설탕 무역을 둘러싼 17세기 전쟁

설탕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대한 대응에 나섰습니다. 1595년에는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항구들을 공격해 약탈했고, 1604년에는 바이아의 도시 살바도르를 정복하려 공격했지만 실패했습니다. 1609년부터는 스페인과 휴전을 맺어 이 상황이 1621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휴전 기간은 네덜란드가 스스로 설탕 사업 장악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활용되었습니다. 1621년에는 서인도 회사(West-Indische Compagnie, WIC)가 설립되었으며, 이 회사의 목표는 아프리카의 노예 무역과 브라질의 설탕 무역을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휴전이 끝나고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의 전쟁이 재개되자, 네덜란드는 브라질로 눈을 돌렸습니다. 1624년 바이아의 살바도르에 대한 첫 공격이 감행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몇 시간의 전투 끝에 당시 브라질의 수도였던 살바도르를 점령했지만, 현지의 저항이 강해 도시를 넘어 진출하지는 못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1625년 중반까지 살바도르에 머물렀다가, 스페인이 보낸 1만 2천 명의 병력에 힘입은 포르투갈 측의 탈환 작전으로 축출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네덜란드는 사략선(privateer)을 통한 공격으로 스페인에 대한 견제를 계속했으며, 그 일환으로 1627년 살바도르가 다시 약탈당하기도 했습니다.

다음 해인 1628년에는 스페인 함대를 나포해 상당한 재산을 확보했고, 이 자금은 1630년 페르남부쿠를 공격할 함대를 준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페르남부쿠 침공

네덜란드의 브라질 침공: 이베리아 연합과 설탕 무역을 둘러싼 17세기 전쟁

1630년 WIC가 조직한 함대에 약 7천 명의 병력이 실려 파견되었습니다. 공격 대상은 페르남부쿠의 중심지 올린다(Olinda)였습니다. 1630년 2월 14일 네덜란드는 도시를 점령했고, 곧이어 방어 거점으로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헤시피(Recife)로 중심지를 옮겼습니다.

이 성공을 발판 삼아 네덜란드는 브라질 북동부에 식민지를 세우고 빠른 확장을 시도했습니다. 1630년부터 1637년까지가 바로 네덜란드가 세아라(Ceará)부터 상프란시스쿠 강(São Francisco River) 유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한 시기입니다.

네덜란드 식민지의 두 번째 시기는 가장 두드러진 시기로, 네덜란드 세력이 브라질에서 절정에 달했던 시기를 이룹니다. 1637년부터 1643년까지 지속된 이 시기는 WIC의 초청으로 브라질 내 네덜란드 식민지의 총독이 된 독일 출신 군인 요한 마우리츠 데 나사우(João Maurício de Nassau)의 통치로 상징됩니다.

나사우는 버려진 제당소들을 재가동시켜 지역 경제를 회복시키고자 했습니다. 이 제당소들은 해당 지역에서 재건하려는 사람들에게 되팔렸습니다. 또한 그는 헤시피에 대한 도시 개혁을 추진해 다리를 건설하고 거리를 넓히는 등 도시의 청결 유지에 힘썼으며, 도시 인근 하천의 오염을 금지했습니다.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나사우는 예술가와 학자를 높이 평가하여 여러 이들이 브라질에 오도록 장려했습니다.

식민지를 괴롭힌 큰 문제 중 하나는 높은 식량 가격이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고자 나사우는 노예를 소유한 모든 이들에게 일정량의 카사바(마니옥)를 재배하도록 강제했지만, 이 조치는 기대만큼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포르투갈의 탈환

1640년부터 WIC는 심각한 재정 문제에 직면하기 시작했고, 이는 네덜란드 식민지의 재정 건전성을 흔들었으며 나사우와 회사 이사진 사이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현지 제당소 주인들에 대한 대출 조건이 강화되면서 그들과 네덜란드 사이에 반감이 조성되었고, 이는 포르투갈의 귀환을 지지하는 여론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

같은 해인 1640년 포르투갈에서는 복고 운동이 일어나 브라간사(Bragança) 왕가의 새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인의 왕위 복귀는 북동부 탈환론의 확산에도 일조했습니다. 결국 포르투갈은 탈환 준비에 착수했고, 1645년부터 브라질 전쟁(Guerras Brasílicas)이라 불리는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WIC의 재정 문제로 네덜란드는 힘을 잃었고, 나사우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구아라라페스(Guararapes)에서 벌어진 1648년과 1649년의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했습니다. 1652년부터는 네덜란드가 잉글랜드와 전쟁에 돌입하면서 북동부로 향하는 적은 자원마저 더욱 줄어들었습니다.

더 이상 지원을 받거나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게 된 네덜란드 식민지는 1654년 헤시피가 포위당하고 공략당하면서 포르투갈에 의해 최종 탈환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로부터 빼앗았던 거점들마저 상실하며 브라질 진출의 야망을 완전히 접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