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 등장한 히피 운동은 당시 자본주의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관과 거리를 둔 참신한 세계관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대부분 젊은이들이었던 히피들은 가족과 안락한 가정을 떠나 음악과 환각제, 그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는 나른한 생활에 빠져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평화와 사랑의 세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향락 집단이 아니었다
그러나 히피들을 단지 향락에 빠져 주변 상황에 무심한 무리로만 묘사하는 것은 그들의 실체를 놓치는 일입니다. 1960년대 내내 이 세대의 구성원들은 흑인 민권운동과 함께 중요한 정치적 쟁점을 논의했고, 여러 시대적 사건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히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습니다.
히피들은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시민권 확대와 당시 진행 중이던 전쟁의 종식을 위해 싸웠습니다. 여러 상황에서 권력 당국은 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해 논의의 본질을 가리고 히피들의 비주류적 행동만을 부각시켰습니다. 또한 이른바 '문제아들'을 공공장소에서 몰아내기 위해 경찰력이 동원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1968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 사건
히피 운동의 대표적인 충돌 중 하나로는 1968년 8월 26일부터 29일까지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의 대규모 동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애비 호프먼(Abbie Hoffman)과 제리 루빈(Jerry Rubin)이 이끈 이른바 '생명의 축제(Festival of Life)'에서는 미국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졌습니다. 수많은 파격적인 행보 가운데, 히피들은 돼지 한 마리('피가수스', Pigasus)를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경찰과 시위대 사이의 긴장감은 급속히 고조되었고, 결국 곳곳에서 폭력적인 진압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 직전에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가 연달아 암살되면서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 사이의 갈등이 이미 달아오른 상태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노골적으로 보수 성향을 지닌 리처드 닉슨 대통령(재임 1969~1974년)의 집권으로 대중의 불만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
1970년 5월 4일에는 오하이오주 켄트 주립대학교(Kent State University)에서 또 한 번의 큰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는 히피와 다른 학생들이 미국의 베트남 전쟁 수행과 최근의 캄보디아 침공에 항의하기 위해 결집했습니다. 이 시위에서 정부 당국은 주방위군(National Guard)을 소집해 사태를 진압했고,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이 충돌 끝에 네 명이 사망하고 아홉 명이 다치는 비극이 빚어졌습니다.
저항의 유산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히피 운동의 도전이 당대의 현실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회를 그려내고 새로운 지각 방식을 추구하면서도, 히피들은 당시 정부의 정치적 행보에 맞서는 적극적인 목소리였습니다. 그들의 독창성과 용기는 오늘날에도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문제와 권리 보장에 관심을 두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글: Rainer Sou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