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4월,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의 마지막 대규모 격전이 베를린에서 펼쳐졌습니다. 소련군은 수백만 병력을 동원해 베를린을 공격해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고, 이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는 자살했으며 나치 독일은 1945년 5월 초 항복했습니다.
배경
1945년 4월의 독일은 1939년부터 지속된 전쟁 부담으로 국가가 붕괴 직전에 몰려 있었습니다. 소련군은 베를린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들이 다가올수록 독일에 대한 복수의 기세도 높아져 갔습니다. 소련군의 공세에 맞선 독일군의 저항은 무질서하고 절박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이 처음부터 이런 처지였던 것은 아닙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었고, 폴란드 정복을 계기로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 수많은 나라를 연달아 정복하며 독일에게 승슬장구한 시기가 이어졌습니다.
전쟁의 중요한 분기점은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 침공을 개시하면서 찾아왔습니다. 초기에는 순조롭게 진격했지만 모스크바 성문 앞에서 저지당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참패를 당했습니다. 소련 영토에서의 패배는 독일 경제를 크게 약화시켰고, 더 이상 전쟁 부담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1942년부터 1943년 사이에는 쿠르스크 전투를 중심으로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북아프리카에서의 패배로 독일의 약체화가 뚜렷해졌고, 이에 따라 연합군은 1943년 이탈리아에 상륙했습니다. 1944년부터 독일은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았습니다.
- 프랑스: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통해 독일에 대한 새로운 서부 전선을 열었습니다.
- 이탈리아: 연합군은 1943년부터 이탈리아에서 독일군을 압박해 왔지만 진격 속도는 매우 느렸습니다.
- 폴란드: 소련군은 독일군을 축출하고 수도 바르샤바를 탈환하기 위해 폴란드에서 대공세를 개시했습니다.
1945년에 들어서면 아르덴과 부다페스트에서의 패배로 독일의 몰락은 명백해졌습니다. 결국 독일은 최악의 사태, 즉 소련군의 베를린 공격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를린 공방전
베를린 포위전은 1945년 4월에 시작되었습니다. 소련군은 25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했고, 수천 대의 전차와 포, 항공기가 이를 지원했습니다. 베를린 공격에 대한 전략의 상당 부분은 스탈린 본인이 직접 수행했지만, 코네프와 주코프 같은 지휘관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스탈린은 베를린 함락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는 영국군과 미국군보다 먼저 도시를 점령하기를 원했습니다. 스탈린의 베를린 집착은 독일이 소련 땅에 저질렀던 파괴에 대한 개인적 복수심으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독일이 핵무기 개발 과정에서 진행한 과학 연구의 기밀 정보를 소련이 선점하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소련군의 임박한 위협 앞에서 독일 민간인들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수천 명이 필사적으로 기차를 타고 도시를 탈출하려 했고, 남겨진 사람들은 가능한 한 식량과 물을 비축하고 지하실에 숨어 소련군의 폭격을 피했습니다. 독일 방어군에는 13세에서 18세 사이의 청소년과 60세 이상의 노인까지 수천 명이 동원되어 있었습니다.
4월 16일, 소련군은 베를린 근교 젤로(Seelow)에 구축된 독일군 방어선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주코프는 독일군에 대한 대규모 포격을 명령했고, 소련군 포병은 120만 발이 넘는 포탄을 발사했습니다. 젤로 방어선 돌파전에서 소련군은 3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공격은 4월 21일에야 완료되었습니다.
4월 25일 도시가 공식적으로 포위되자, 베를린 시가전은 거리 하나하나를 두고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소련군은 일주일에 걸쳐 조금씩 전진해 나갔습니다. 소련군의 침공이 완전히 굳혀지기 며칠 전, 수많은 나치 지도자들이 통행로가 열려 있는 동안 도시를 탈출했습니다. 히틀러에게도 바이에른으로 피신하라는 제안이 있었지만, 그는 베를린을 떠나기를 거부했습니다.
소련군이 독일 수도를 점령하면서 현지 주민들을 향한 폭력의 광기가 시작되었고, 대규모 약탈과 강간이 자행되었습니다.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Antony Beevor)에 따르면 소련군이 베를린에서 보여준 폭력의 수위는 다른 지역보다는 낮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 13만 명의 여성이 소련군 병사들에게 강간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많은 이들이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히틀러의 최후
아돌프 히틀러는 생애 마지막 나날을 독일 의사당에서 약 360미터 떨어진 지하 벙커에서 보냈습니다. 1945년 4월 30일 소련군이 의사당을 점령하자, 히틀러는 아내 에바 히틀러(에바 브라운)와 함께 자살했습니다. 나치 지도자의 자살에 대해 앤터니 비버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마침내 히틀러는 아내와 함께 응접실로 물러났다. 아내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면서도 점심 식사 때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총성을 들은 사람은 없었지만, 오후 3시 15분 조금 지난 후 시종 린게가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히틀러는 머리에 총을 겨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에바 히틀러는 청산가리를 먹었다. 두 사람의 시신은 회색 국방군 담요로 감싸져 총리 관저 정원으로 옮겨졌고,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휘발유를 부어 화장되었다."
히틀러의 죽음 이후 독일의 권력은 카를 되니츠(Karl Dönitz)에게 넘어갔고, 그는 1945년 5월 2일 무조건 항복 조건을 수락했습니다. 그 결과 독일은 연합국에 의해 점령되어 여러 점령 지역으로 분할되었습니다. 또한 연합국은 전쟁 기간 독일 측에서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의 책임자들을 심판하는 재판을 준비했습니다.
참고 자료
- HASTINGS, Max. 『Hell: The World at War 1939–1945』. Rio de Janeiro: Intrinsic, 2012, p. 643.
- BEEVOR, Antony. 『The Second World War』. Rio de Janeiro: Record, 2015, p. 817.
- HASTINGS, Max. 앞의 책, p. 645.
- BEEVOR, Antony. 앞의 책, p. 817.
- BEEVOR, Antony. 앞의 책, p. 834–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