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최대 규모의 전투였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7월부터 1943년 2월까지 독일군과 소련군이 벌인 치열한 공방전으로, 약 2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련이 감행한 막대한 노력과 독일군 전력의 고갈은 연합국의 승리를 결정지었고, 이는 전쟁 전체의 운명을 바꾸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배경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진 전투는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개시한 바르바로사 작전의 일환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소련 침공을 위해 세 가지 주요 목표를 설정했는데, 바로 레닌그라드, 수도 모스크바,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지역의 공업단지였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프랑스 정복 때처럼 번개전 방식으로 소련을 신속하게 정복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계획이 실패하면서 소련 영토 내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동부 전선은 독일군의 주요 전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초기의 빠른 진격은 느리고 고통스러운 전진으로 변해갔습니다. 1942년 중반, 스탈린그라드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핵심 목표가 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소련의 중요한 공업 단지였을 뿐만 아니라 볼가 강변에 위치해 있었고, 광물과 석유가 풍부한 캐우카수스 지역으로 통하는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전투의 경과

1942~1943년 전투 당시 폐허가 된 스탈린그라드 시내의 모습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7월 17일 정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나치 군대가 도시로 접근하면서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볼가 강을 건너 소련 동부로 대피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지휘권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에게 맡겨졌습니다.
독일군의 공격은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대규모 폭격으로 시작되었고, 도시의 상당 부분이 폐허로 변했습니다.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 점령 기한을 명령한 직후인 9월 13일, 독일군의 첫 대규모 지상 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히틀러의 집착이 되었고, 그는 각종 자원을 이 도시 공략에 집중시켰습니다. 이는 다른 전선에서의 독일 전쟁 수행 능력을 크게 저해했습니다. 또 다른 문제가 된 결정은 독일군 전선을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확장시킨 것이었는데, 이것이 독일군 실패의 결정적 원인으로 평가됩니다.
스탈린 입장에서도 스탈린그라드 방어는 그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방어 지휘는 바실리 추이코프 소장에게 맡겨졌습니다. 추이코프 소장은 도시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당시 지역 당 위원이던 흐루쇼프의 질문에 "우리는 이 도시를 지키거나, 아니면 죽음을 무릅쓰고 지키려 할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또한 전투 기간 동안 스탈린은 소련군 내 패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특별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후퇴하거나 탈영하는 병사는 즉결 처분되었으며, 전투 기간 동안 약 1만 3,500명의 소련 병사가 배신자로 처형된 것으로 추산됩니다.
스탈린그라드의 전투는 극도로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었고, 당시 보고서들은 도시에서 살고 싸운 사람들이 겪은 지옥 같은 현실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전투는 거리마다, 집마다, 블록마다 벌어졌습니다. 소련 측 보고서는 스탈린그라드를 "지옥보다 열 배나 더 끔찍한 곳"이라거나 "예상보다 훨씬 더 파괴된 곳"으로 묘사했습니다.
소련군의 상황은 절박했고 붕괴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그들은 매일 볼가 강을 건너오는 무기와 새로운 병력 덕분에 간신히 버틸 수 있었습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증원 부대가 때로는 대낮에도 강을 건너야 했고, 이는 독일 항공기의 손쉬운 표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소련군의 전략은 비록 체계적이지 못했지만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추이코프는 독일군과 소련군의 교전 거리를 의도적으로 좁히는 전술을 선택했습니다. 또한 도시 곳곳에 흩어진 폐허는 독일군과 그들의 장갑 차량의 진격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시가전 양상 자체도 독일군에게 큰 부담이었는데, 대규모 기동이나 측면 공격 같은 전술적 선택지를 사실상 봉쇄했기 때문입니다.
독일군의 패배
1942년 말부터 1943년 초에 걸쳐 두 차례의 소련 공세가 성공적으로 전개되어 독일군을 도시에서 몰아냈습니다. 세 번째 공세도 있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소련의 공세는 독일군을 도시 외곽으로 밀어내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이끄는 부대를 완전히 포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파울루스는 히틀러에게 후퇴 허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약 20만 명의 지친 병사로 구성된 파울루스의 부대는 히틀러의 거부로 인해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편 지역의 또 다른 독일군 부대를 지휘하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어 후퇴를 선택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 남겨진 독일군의 항복은 1943년 2월 2일 이루어졌습니다. 수개월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소련이 승리했고, 패배한 독일은 1945년까지 이어지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총 약 2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됩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소련의 산업 생산량이 독일의 생산 능력을 크게 웃돌았고, 새로운 전투 병력이 계속 늘어난 반면 독일은 지휘관과 병력이 지속적으로 감소했습니다. 역사가 맥스 헤이스팅스의 서술은 이러한 격차를 잘 보여줍니다.
"소련과 그 군대의 힘은 침략자의 힘이 약해짐에 따라 빠르게 성장했다. 1942년 독일은 4,800대의 장갑 차량만 생산한 반면, 러시아는 24,000대를 생산했다. […] 같은 해 러시아는 21,700대의 항공기를 제조한 반면 독일은 14,700대에 그쳤다. 붉은 군대는 NKVD[소련 비밀경찰] 소속 51만 6천 명의 지원을 받는 600만 명의 병사를 운용했다."
|1| BEEVOR, Antony. The Second World War. Rio de Janeiro: Record, 2015, p. 404.
|2| HASTINGS, Max. Hell: the world at war 1939-1945. Rio de Janeiro: Intrinsic, 2012, p. 329.
|3| 상동, p. 328.
|4| 상동, p. 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