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조셉 스탈린: 소련을 지배한 독재자의 생애와 통치

조셉 스탈린(Josef Stalin)은 소련(USSR)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의 명성은 무려 약 30년 가까이 권력을 유지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재임 기간 동안 스탈린은 반대파를 박해하고 숙청하는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했으며, 동시에 소련에 심대한 변화를 일으켜 이 나라를 진정한 공업 강국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스탈린은 또한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조국의 저항을 이끌었던 지도자로도 기억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격퇴한 공로로 소련 내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그가 저지른 만행은 그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유년기와 성장 배경

조셉 스탈린: 소련을 지배한 독재자의 생애와 통치

조셉 스탈린은 1878년 12월 18일 고리(Gori)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리는 현재 조지아(코카서스 지역의 나라)에 속해 있지만, 19세기 당시에는 차르가 다스리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소련의 독재자로 잘 알려진 그의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슈빌리(Iosif Vissarionovich Dzhugashvili)였습니다.

스탈린의 가정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는 비사리온 주가슈빌리와 에카테리나 게아드제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였는데, 부모에게는 그 이전에 다른 자녀들이 있었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아버지는 성공하지 못한 구두수선공이었고, 어머니는 하인 출신 집안에서 태어나 청소부와 빨래꾼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기 때문에 스탈린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함께했습니다.

스탈린과 아버지의 관계는 결코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비사리온은 알코올 중독자였고, 아내와 아들을 잦은 폭력으로 학대했습니다. 이러한 폭력과 더불어 아들의 미래를 두고 벌인 갈등 끝에 부부의 결혼 생활은 파국을 맞이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종교적인 길을 걷기를 바랐던 반면, 아버지는 구두수선공으로 키우기를 원했습니다.

16세가 되던 해, 스탈린은 어머니와 함께 티플리스(Tiflis)(현재의 트빌리시)로 이주하여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종교 교육 기관에 몸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학교 시절, 조지아 최대 도시의 활발한 정치 분위기와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곳에는 비밀 정치 단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혁명가로서의 삶

조셉 스탈린: 소련을 지배한 독재자의 생애와 통치

신학교에 있는 동안 스탈린은 19세기 말 조지아의 격동적인 정치 상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학교 당국이 금지한 서적들을 읽었고, 결국 메사메 다시(Messame Dasi)라는 사회민주주의 단체에 관여하게 됩니다. 이 비밀 결사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조지아 독립을 주장하는 단체였습니다.

1899년, 스탈린은 신학교를 자퇴하고 티플리스에서 직장을 구했습니다. 이 직장은 사실 그가 이끌던 혁명 활동을 위장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이미 회합을 조직하고 친구들에게 자신이 믿는 사회주의 대열에 합류하도록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1901년, 스탈린은 러시아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이듬해 조지아 연안의 한 마을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하던 중 처음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훗날 소련의 지도자가 될 그는 시베리아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1905년부터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당 내부 분열 과정에서 볼셰비키 진영에 합류했습니다.

러시아 혁명과 권력의 기반

1905년, 스탈린은 '총 리허설'이라 불리는 1905년 혁명에 참여했으며, 핀란드에서 열린 볼셰비키 회의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로부터 12년 후, 볼셰비키는 러시아 영토 내에서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했고, 1917년 10월 마침내 러시아의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합니다.

1905년부터 1917년까지 스탈린은 볼셰비키와 혁명의 이름으로 수많은 활동을 펼쳤습니다. 여러 차례 체포되었지만 그는 저명한 이름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는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는 중요한 행정 업무에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강철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의미의 '스탈린'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후, 스탈린은 민족인민위원회 등 러시아의 행정 요직을 맡았습니다. 내전 기간에는 새 정권 전복을 시도하던 반혁명 세력에 맞서는 작전의 지휘를 맡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공로 덕분에 스탈린은 레닌, 트로츠키, 스베르들로프(1917년 혁명의 핵심 인물 중 하나)와 함께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부상했습니다. 내전 이후에는 공산당 위원회인 정치국(Politburo)과 노무 문제를 담당하는 정치국 산하 위원회인 조직국(Orgburo)의 직책도 역임했습니다.

내전 이후 러시아는 소련으로 개편되었고, 스탈린은 서기장(당 내 최고 직위)으로 임명되면서 소련 정부 내에서의 위상이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바로 스탈린이 당 내에서 급격히 부상하던 이 시기에 레닌이 사망했습니다.

권력 투쟁

소련의 권력 다툼은 1923년, 지도자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레닌은 뇌졸중을 앓았고, 그의 지도자로서의 위치가 흔들리면서 다른 당원들이 권력을 다투는 공간이 열렸습니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 권력을 놓고 경쟁한 인물들은 스탈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였습니다.

레닌은 스탈린이 너무 무례해서 서기장 직위를 맡기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그를 해임하려 했습니다. 스탈린은 실제로 사임서를 제출하기도 했지만, 권력 경쟁자였던 세 사람을 포함한 당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스탈린이 승리한 이유는 당 관료제를 통해 부상하여 당원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당 내부의 지지가 대중의 지지보다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27년, 스탈린이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를 당에서 축출하면서 그는 사실상 소련의 지배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세 사람은 그 순간부터 새 지도자에 의해 숙청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결국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1936년에, 트로츠키는 1940년에 처형되었습니다.

스탈린의 통치

스탈린주의는 스탈린이 소련의 지도자로서 강요한 전체주의 체제를 가리킵니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는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가 강제로 추진되었고, 극심한 개인 숭배가 조성되었으며, 반대파와 소수민족에 대한 박해가 자행되어 약 2천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냈습니다.

1928년에는 5개년 계획과 토지 집단화가 시작되었습니다. 5개년 계획은 필수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목표 설정을 통해 소련의 공업화를 촉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집단화는 소련의 생산 토지를 국유화하여 사유 농장과 쿨라크(kulaks)라 불리는 부농 계층을 폐지하려는 정책이었습니다.

집단화 정책은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큰 저항에 부딪혔고, 스탈린의 대응은 더욱 강경한 탄압이었습니다. 수백만 명이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 같은 오지에 위치한 강제 수용소(굴라그)로 끌려갔으며, 반대파에 대한 총살형도 집행되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혁명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모든 이들을 박해하는 대숙청(Great Purge)이 단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소수민족과 공산당의 저명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즉결 처형되었고, 관료와 군인들도 '트로츠키즘' 혐의로 처형당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조셉 스탈린: 소련을 지배한 독재자의 생애와 통치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소련을 이끌었습니다. 1939년 그는 독일과 불가침 조약에 서명했고, 이 조약은 그가 평소 갖고 있던 영토 확장의 야망을 실행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그는 폴란드 동부를 침공·병합했으며, 핀란드 침공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을 위해 나라를 준비해 두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독일의 공격이 1942년 이후에야 올 것이라 예상하여 임박한 독일의 공격 경고를 무시했고, 이로 인해 소련은 패배의 위기에 몰릴 뻔했습니다.

독일군은 세 개 방면으로 공세를 집중했습니다. 북부의 레닌그라드, 중부의 모스크바, 남부의 키예프, 스탈린그라드와 코카서스가 그 대상이었습니다. 스탈린은 공업 시설들을 영토 내륙으로 이전하라고 명령했고, 수백만 명의 병사를 소집했으며, 전투 중 후퇴하는 자에게는 총살형에 처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소련이 감행한 이러한 노력 덕분에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패배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연합국과의 협약을 통해 스탈린은 나치에 대한 최후의 전투에서 소련군이 베를린을 공격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1945년 4월, 독일 수도를 정복하기 위해 약 250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지만, 그 대가로 소련은 약 2,500만 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전쟁 후 스탈린은 전체주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소련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중에 냉전의 구도가 형성되었고, 소련은 한국전쟁에도 비밀리에 참여했습니다.

죽음과 이후의 평가

스탈린은 3월 1일 뇌졸중을 앓은 뒤, 1953년 3월 5일 사망했습니다. 뇌졸중 이후 며칠 동안 적절한 간호와 의료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그의 죽음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사망 이후 소련의 권력은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넘어갔습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개인 숭배를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스탈린이 통치 기간 동안 저지른 만행을 고발하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흐루쇼프의 고발은 1956년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비밀리에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결국 외부로 유출되었습니다. 그 결과 스탈린을 옹호하는 진영과 비판하는 진영으로 나뉘면서 커다란 공산주의 진영의 균열이 전 세계로 번졌습니다.

가족 관계

스탈린은 평생 두 번 결혼했습니다. 그의 두 아내는 다음과 같습니다.

  • 에카테리나 스바니제(Ekaterina Svanidze): 1906년부터 1907년까지 부부 생활을 했으며, 1907년 발진티푸스로 사망했습니다.
  • 나데즈다 알릴루예바(Nadezhda Alliluyeva): 1919년부터 1932년까지 부부 생활을 했으며, 1932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스탈린은 총 세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야코프 주가슈빌리(Yakov Dzhugashvili), 그리고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바실리 주가슈빌리(Vasily Dzhugashvili)와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Svetlana Alliluyeva)입니다. 두 결혼 사이에 스탈린은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에 살던 리디야 페레프리기나(Lidia Pereprygina)라는 소녀와 관계를 맺기도 했으며, 이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 알렉산더(Alexander)는 그가 끝내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미지 출처

[1] secondhand bookstores and Shutterstock

[2] Everett Historical and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