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제2차 중일전쟁(1937~1945):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중국의 저항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약 8년간 지속된 제2차 중일전쟁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충돌로, 일본군이 자행한 극심한 폭력으로 인해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제2차 중일전쟁(1937~1945):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중국의 저항

제2차 중일전쟁 개요

제2차 중일전쟁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에서 비롯된 전쟁입니다. 이 분쟁은 1937년 베이징 주둔 일본군과 중국군 간의 마찰을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흐름과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약 2천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전쟁의 배경

제2차 중일전쟁은 19세기 내내 지속된 일본의 대중국 제국주의 정책이 빚은 결과물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경제·교육 체계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극단적인 국가주의와 제국주의 야망이 함께 성장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부상은 국가가 영토 확장을 위해 움직이게 만들었고, 여러 국제 분쟁에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먼저 일본은 1894년부터 1895년까지 벌어진 청일전쟁(제1차 중일전쟁)에서 승리하며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장악했습니다. 이어서 1904년부터 1905년까지는 만주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충돌했는데, 이것이 바로 러일전쟁입니다. 이 두 전쟁에서 거둔 승리는 일본 내부에 환희의 분위기를 조성했고, 제국주의 옹호 세력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일본 정부는 점점 더 군국주의적이고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 결과 미국과 중국 등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는 상당히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1931년부터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는 공식적이지 않은 충돌이 잇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봉천 사건(만주사변)과 루거우차오 사건

1931년 9월, 일본은 만주에 설치한 자국 철도에 대한 '중국군의 공격'을 조작해 사태를 자초했습니다. 일본은 이를 침략의 명분으로 삼아 만주를 무력 점령하고 자국 영토에 편입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봉천 사건(만주사변)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결과 일본의 이익에 복종하는 괴뢰 국가인 만주국(滿洲國)이 수립되었습니다.

이후 양국 간에 소규모 교전이 여러 차례 벌어졌지만, 제2차 중일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1937년 7월의 루거우차오 사건(마르코폴로교 사건)부터입니다. 당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벌어진 마찰이 일본군의 공격으로 번지면서 전면전이 촉발되었습니다.

전쟁의 전개 과정

1930년대 일본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중국은 실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이에 맞설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 내부의 두 거대 세력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국민정부)과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었습니다. 이 두 세력은 서로 적대 관계였으며, 전쟁 중에도 내부적으로 다투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국민당 군대는 독일 출신 장군을 고용해 군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장군은 장기 소모전에 대비하라는 지침을 받았는데, 당시 중국군의 열악한 장비와 준비 부족으로는 일본과의 신속한 정면 대결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공산당 진영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일본에 맞서 국민당과 연합하게 되었으나, 마오쩌둥은 이 지시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베이징 함락과 상하이 전투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군사적 우위는 즉각 드러났습니다. 선전포고 불과 사흘 만에 일본군은 베이징을 점령했습니다. 이에 국민당은 상하이에서 대규모 저항을 조직했고, 일본군이 이 도시를 함락하는 데 약 석 달이 걸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4만 명, 중국군 18만 7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1|.

난징 대학살

상하이에서 겪은 어려움에 분노한 일본군은 난징 전투에서 보복에 나섰습니다. 국민당 군대는 난징을 방어하지 못했고, 도시는 순식간에 일본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포로로 잡힌 수천 명의 중국군 병사들이 처형당했습니다.

더 나아가 중국 민간인들은 집단 공격과 학살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이 에피소드는 난징 대학살(난징 강간 사건)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도시 민간인에 대한 폭력 행위 가운데 약 2만 명의 여성들이 일본군 병사들에게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난징 주민에 대한 공격으로 약 2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2|.

일본군의 잔혹성

일본군의 잔혹함은 이 전쟁의 특징이었으며, 아시아 전역의 전장에서 일본군 병사들은 이런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일본군의 잔혹성에 대해 역사학자 앤서니 비버는 다음과 같이 평합니다.

[일본군 병사의] 기초 훈련은 개인의 개성을 파괴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신병들을 단련하고 자극하기 위해 부사관과 하사관들은 끊임없이 모욕하고 구타했다. 이는 억압의 부작용이라 할 수 있는데, 고통을 당한 자들이 패배한 적의 병사와 민간인에게 분노를 푸는 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모든 이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중국인이 일본의 '신성한 민족'보다 완전히 열등하며 '돼지보다도 못하다'고 세뇌당해 있었다.|3|

731부대의 만행

일본군의 조직적 폭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바로 731부대입니다. 명목상으로는 일본군이 중국에서 사용하는 식수의 수질 관리를 위해 창설된 이 부대는, 비밀리에 인체를 대상으로 한 끔찍한 실험을 수행했고 화학·생물학 무기의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세균학자 시로 이시이(石井四郎) 박사가 이끌었던 이 부서는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해부(생체해부)를 감행했고, 사람을 실험용 기니피그 삼아 내성 시험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발진티푸스 같은 질병을 중국 일부 지역에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731부대의 희생자는 총 3천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미국의 개입과 전쟁의 종결

1941년 일본의 진주만 해군 기지 기습 이후,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대대적인 지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이러한 지원은 이미 1940년부터 존재했지만, 진주만 사건 이후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아시아·태평양 전선이 전개되면서 일본은 서서히 패색이 짙어졌습니다.

일본의 패망은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 본토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확정되었습니다. 원폭 투하 이후 일본은 연합국(중국도 연합국의 일원이었다)에 무조건 항복했고, 이로써 중국과의 전쟁도 막을 내렸습니다.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르거나 이를 승인한 혐의로 기소된 많은 일본인들은 이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 재판)에서 심판받았습니다. 이 재판소는 2년 반에 걸쳐 전쟁 중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은 사람들을 심리하고 유죄 또는 무죄를 판결했습니다.

|1| BEEVOR, Anthony. The Second World War. Rio de Janeiro: Record, 2015, p. 76.
|2| 상동, p. 76.
|3| 상동, p.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