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새로운 전쟁의 시작 – 기원전 217년, 한니발의 출정과 로마의 불길한 징조

제22권: 기원전 217년과 216년의 사건들

1부: [22권 1~18장]

전쟁의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다(기원전 217년)

봄이 이미 다가오고 있었다. 한니발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아펜니노 산맥을 넘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큰 위험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겨울 진영에 머물러 있던 끝에 마침내 그곳을 떠났다. 약탈에 대한 기대를 품고 로마 편에 섰던 갈리아인들은, 정작 자신들이 남의 영토에서 가축과 포로를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땅이 전쟁의 무대가 되고 두 군대의 겨울 주둔지로 짓밟히는 현실을 마주하고는, 로마에 대한 증오를 한니발에게로 돌렸다. 갈리아 족장들은 여러 차례 한니발을 기습하려 했으나, 서로가 서로를 배반하는 바람에 — 그들은 음모를 꾸미듯이 가볍게 밀고도 했다 — 한니발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때로는 옷을, 때로는 가발을 바꿔 착용함으로써 적들에게 잘못된 흔적을 남겨 그들의 함정을 피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는 오히려 그가 겨울 주둔지를 평소보다 일찍 떠나게 된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

같은 시기 로마에서는 집정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가 3월의 이데스(15일)에 임기를 시작했다. 그가 이 자리에서 원로원과 전반적 정세를 논의하자, 의원들 사이에서 카이우스 플라미니우스에 대한 반감이 다시 표면으로 드러났다. "두 명의 집정관을 선출해 놓고 실제로는 한 명밖에 없는 셈"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과연 지휘권이나 점조(鳥占)에 있어 어떤 정당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정식 관리는 가문의 제사부터 국가와 가정의 수호신(페나테스)에 이르기까지, 라티나 축제(Feriae Latinae)를 거행하고 알바 언덕에서 제사를 지내며, 카피톨리움에서 공개적으로 의례에 따라 서원을 마친 뒤에야 이러한 권리를 온전히 지닌다. 반면 일개 사민(私民)에게는 점조권이 따르지 않으며, 점조 없이 떠난 자는 외국 땅에서 그 권한을 본래의 효력과 함께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보고된 불길한 조짐(프로디기움)들로 인해 더욱 커졌다. 시칠리아에서는 여러 병사들의 투창이, 사르디니아에서는 성벽 위를 순찰하던 기병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저절로 불타올랐다. 해안에서는 수많은 불길이 타올랐고, 방패 두 개가 피를 흘렸으며, 몇몇 병사는 벼락에 맞아 쓰러졌다. 태양은 유난히 작아 보였다. 프라에네스테에서는 타오르는 돌이 하늘에서 떨어졌고, 아르피에서는 하늘에 방패들이 나타나 태양과 달이 서로 싸우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카페나에서는 대낮에 달이 두 개 떠올랐고, 카이레의 물은 피가 섞여 흘렀으며 헤라클레스 샘터의 물에는 핏자국이 묻어났다. 안티움에서는 추수꾼들이 피에 물든 이삭이 광주리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팔레리이에서는 하늘이 널찍한 틈처럼 갈라지며 눈부신 빛이 그 틈으로 쏟아지는 듯했고, 점복 비석들이 저절로 움츠러들었으며 "마보르스(마르스)가 창을 휘두른다"는 글이 새겨진 비석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같은 시기 로마에서는 아피아 가도에 세워진 마르스 신상과 늑대 상들이 땀을 흘렸다. 카푸아에서는 하늘이 불타오르는 듯했고 달이 비 한가운데 떨어지는 듯했다. 이 무렵부터 사람들은 더 사소한 조짐들까지 믿었다. 어떤 이는 자기 염소가 양털을 기른 것을 보았다 하고, 암탉이 수탉으로, 수탉이 암탉으로 변했다는 소문도 퍼졌다.

집정관은 이렇게 보고된 조짐들을 차례로 설명하고 증인들을 쿠리아(원로원 의사당)에 입장시킨 뒤, 종교 문제에 관해 원로원의 자문을 구했다. 원로원은 이 조짐들을 달래기 위해 일부는 큰 제물을, 일부는 젖을 먹이는 짐승을 바치는 제사를 지내고, 삼일 동안 모든 신의 강림 침상(lectisternium) 앞에서 기도를 올리기로 결의했다. 나아가 데켐비리(십인 위원회)가 성서(聖書)를 살핀 뒤 신들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규정하는 바를 따르기로 했다. 데켐비리의 건의에 따라 먼저 유피테르에게 금 50파운드로 만든 번개를 바치고, 윤노와 미네르바에게는 은 제물을 바치기로 했다. 아벤티누스 언덕의 윤노 레기나와 라누비움의 윤노 소스피타에게는 큰 제물을 바치며, 로마의 부녀자들은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만큼씩 돈을 모아 아벤티누스 언덕의 윤노 레기나에게 제물을 올리기로 했다. 또한 강림제를 거행하고, 해방 노예 출신 여성들 역시 자기 형편에 걸맞은 기부금을 내어 페로니아에게 제물을 바치기로 했다. 이 일이 끝난 뒤 데켐비리는 아르데아의 포룸에서 큰 제물로 제사를 지냈다. 마침내 — 벌써 12월이 되어서였다 — 로마의 사투르누스 신전에서 제사가 거행되었고, 원로원 의원들이 침상을 마련하는 강림제와 공개 연회가 명령되었다. 도시 전역에는 사투르날리아(농신제)의 환호성이 하루 밤낮 동안 울려 퍼졌으며, 백성들은 이 날을 축제일로 삼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키라고 권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