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전투: 페르시아 전쟁의 서막
마라톤 전투는 페르시아 전쟁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원전 490년 아테네 근교의 마라톤 평원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입니다.
외교적 준비와 그리스 도시들의 반응
기원전 491년 내내 페르시아는 이번 공세를 위해 군사적·외교적 준비에 매진했습니다. 많은 그리스 도시들에 사절단이 파견되어 복속을 요구했고, 일부 도시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거부했으며,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두 도시는 페르시아 사절들을 처형하기까지 했습니다. 다만 두 도시 모두 다가올 공세에 대비한 실질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 원정군의 진격
다레이오스 1세의 조카인 아르타페르네스가 육군을, 다티스가 함대를 지휘하는 페르시아군은 이번에는 에게해를 직접 가로질러 진격했습니다. 나우소스와 델로스를 장악한 뒤(기원전 490년), 에우보이아와 아티카 방면으로 곧장 향한 것입니다. 병력은 기록에 따라 10만에서 20만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대 사학자들은 실제 병력을 2만 5천에서 5만 명 사이로 추정합니다. 당시 기준으로도 이미 상당한 규모입니다. 페르시아 함대는 약 600척의 삼단노선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함대는 에우보이아 남단에 도달한 뒤 항구 개방을 거부한 카리스토스를 유린하고, 아테네 동맹군에게 버려진 에레트리아를 파괴했습니다. 에레트리아 주민들은 수사 인근의 아르데리카로 강제 이주당했는데, 이는 대왕의 복수 여정의 첫 단계를 의미했습니다.
마라톤 해안에 상륙하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의 전제군주였던 히피아스의 조언에 따라 기원전 490년 9월 초, 아테네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마라톤 평원에 인접한 약 4킬로미터 길이의 해변에 상륙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성벽 뒤에서 적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장군(스트라테고스) 밀티아데스의 지휘 아래 약 1만 명의 아테네 및 플라타이아 중장보병(호플리테스)이 페르시아군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9월 13일, 페르시아군은 육지와 바다 양면에서 아테네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기병을 포함한 일부 병력은 팔레론에 상륙하여 신속히 아크로폴리스에 도달할 목적으로 재탑승했습니다. 잔여 병력 약 2만 1천 명은 아테네군의 귀환을 차단하기 위해 마라톤 평원을 가로질러 연안 습지로 흐르는 작은 하천 샤라드라를 건넜습니다.
밀티아데스의 전술
아테네군과 플라타이아 동맹군은 펜텔리콘과 파르네스 두 개의 작은 고지를 점령한 채 스파르타가 약속한 증원군을 기다렸지만, 증원은 더디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테네인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뒤, 적 함대보다 먼저 아테네로 달려가 도시를 지켜야 했습니다.
열 명의 아테네 장군 중 한 명인 밀티아데스는 과거 스키타이 원정 당시 페르시아군과 함께 싸운 경험으로 그 약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서로 다른 출신의 병사들로 구성되어 같은 방언도 쓰지 못하고 함께 싸운 경험도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완(柳) 방패와 짧은 창으로 무장한 페르시아군은 백병전에 취약했습니다.
반면 그리스 호플리테스의 무장은 중장보병 그 자체였습니다. 투구, 방패, 흉갑, 정강이받이, 청동 팔 보호구로 무장하고 검과 긴 창을 갖춘 그들은 좁은 대열(파랑크스)을 이루어 방패로 하나의 벽을 형성하며 싸웠습니다. 밀티아데스는 폴레마르코스 칼리마코스를 설득해 그리스군의 전선을 늘리고, 숫적으로 밀리지 않도록 중앙을 줄이는 대신 양익을 강화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의 최정예 부대는 중앙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는 적을 포위한다는 발상이었습니다.
전투의 전개
아테네군은 화살이 닿는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돌진했습니다. 당시 사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중장비를 찬 호플리테스가 1,500미터를 넘게 질주했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예상대로 제국 각지에서 징집된 오합지졸이거나 사기가 낮은 이오니아인들로 구성된 페르시아군의 양익은 와해되어 함선으로 황급히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군의 중앙은 밀려나며 후퇴했습니다. 이때 양익에 배치된 그리스군은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대신 페르시아군 중앙으로 선회하여 완벽한 집게 기동을 펼쳤고, 페르시아 중앙부마저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전과와 피해 규모
이 전투에서 약 6,400명의 페르시아 병사가 전사했으며, 대다수는 도주하던 중 익사했습니다. 함선 7척이 파괴되었고, 아테네군의 손실은 약 200명에 그쳤습니다. 이러한 격차가 특별히 놀라운 것은 아닙니다. 페르시아군 피해 수치가 분명 과장되었음에도, 그리스와 아시아 계열 군대가 맞선 여러 전투에서 흔히 그리스 1명 사망당 동방 군대 20~30명 사망이라는 비율이 나타났습니다.
아테네로의 강행군
그러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라톤 전투 전에 재탑승했던 페르시아 최정예 부대의 제2차 공격을 저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 함대가 소니온 곶을 돌아 팔레론에 도달하는 데는 약 10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전투로 지친 몸이었지만 그리스 호플리테스들은 7~8시간의 강행군을 감행하여 적 함대보다 약 1시간 먼저 도착했습니다. 기동 실패를 확인한 페르시아군은 상륙을 포기했고, 이로써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역사적 의의
이 전략적 승리는 그리스인들에게 상징이 되었고 아테네에 큰 위상을 안겨주었습니다. 반면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주로 상륙 작전의 실패, 즉 사소한 좌절에 불과했습니다. 원정 자체는 에게해의 많은 섬들을 다레이오스 1세의 세력 아래 예속시키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일부 사학자들(헤로도토스는 이를 부정)에 따르면, 페이디피데스(필리피데스라고도 함)가 바로 이때 훗날 '마라톤'이 된 거리를 달렸다고 합니다. 다만 필리피데스 일화의 진위와 무관하게, 여기서의 진정한 육상 위업은 팔레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아테네 호플리테스들의 집단적 강행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레이오스의 반응과 그 이후
이 패배에 대한 다레이오스의 반응은 처음부터 복수와 새로운 원정 준비였습니다. 그런 거대 제국의 군주가 한 번의 패배에 머물 수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사트라프 아리안데스가 이끄는 이집트의 반란이 일어나 다레이오스 생애 마지막 몇 달을 잡아먹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486년에 사망했고,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뒤를 이었습니다.